“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직접 보고 오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지난달 24일 5년 만의 미국 출장을 마치고 귀국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투자 성과를 자랑하기보다 반도체 업계의 현실에 대한 위기감을 표출했다. 전 세계적인 반도체 증설 경쟁과 자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 움직임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초격차’를 유지해야 하는 기업의 어려운 현실을 토로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평택 4공장(P4)의 선제적인 준비를 시작으로 메모리 반도체뿐 아니라 시스템 반도체에서도 글로벌 1위라는 야심 찬 목표를 향해 본격적인 시동을 걸고 있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P4 착공을 위한 준비 작업에 돌입한 시기에 주목하고 있다. 회사는 앞서 P4~P6 라인 증설을 체계적으로 준비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바 있다. P4~P6 건설에 대비해 이미 평택시에 오는 2025년까지 하루 25만 톤의 공업용수를 확보해달라는 요청도 해놓은 상태다. 평택 2공장의 투자 규모가 30조 원인 만큼 4공장은 30조 원 이상 투입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하지만 P3가 완공되기도 전에 P4를 위한 예열 단계에 들어간 것은 예상보다 빠른 진행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착공에 앞서 적기에 투자 계획을 세워 바로 증설 작업을 진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놓겠다는 회사의 전략으로 풀이된다.
반도체 초격차를 위한 삼성전자의 광폭 행보는 이미 예고됐다. 이 부회장은 지난 8월 가석방 출소 이후 향후 3년간 국내에 240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공언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독보적인 1위를 달리고 있는 메모리 부문의 경우 14㎚(나노미터·10억 분의 1m) 이하 D램, 200단 이상 낸드플래시 분야에서 절대 우위를 공고히 하고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3나노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술 등 최첨단 선단 공정으로 라이벌인 대만 TSMC를 제치고 글로벌 1위를 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삼성전자 측은 당시 “한 번 경쟁력을 잃으면 재기하기가 어려운 반도체 시장에서 공격적 투자를 진행해 산업 전반에서 리더십을 공고히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경쟁이 치열해지는 시장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240조 원 중 상당 부분을 반도체 시설과 관련 인력 채용에 투자할 것으로 보인다. 업계 일각에서는 이 투자 금액 중 절반 이상이 반도체 투자에 활용될 것이라는 시각도 나온다. P4는 평택 캠퍼스에서 이미 가동하고 있는 P2, 내년 2분기께 반도체 장비 반입이 예정된 P3와 마찬가지로 메모리 반도체 제조 라인, 파운드리 라인 모두 운영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팹’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향후 수년 내 주력 분야인 메모리는 물론 파운드리 분야에서 최첨단 공정으로 삼성전자의 반도체 미래를 책임질 핵심 팹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지난달 투자를 확정한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 공장은 시스템 반도체 1위를 향한 삼성전자의 움직임을 본격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회사는 5월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텍사스주 오스틴시에 이어 제2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한 후 고심을 거듭한 끝에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약 20조 원) 규모의 공장을 짓겠다고 밝혔다. 대만의 TSMC가 2024년 완공을 목표로 미국 애리조나에 약 14조 원을 투자해 파운드리 라인 조성에 들어가는 등 글로벌 증설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대규모 해외투자를 통한 성장 동력 확보에 나선 것이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텍사스주와 테일러시 등 지방정부 인센티브와 연방정부 보조금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테일러시는 9월 삼성전자가 사용할 토지의 재산세를 첫 10년간 92.5%, 이후 10년간 90%, 그 후 10년간은 85%를 각각 감면해주는 지원책을 결의했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 등 국내 반도체 업체들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에도 아낌없이 투자를 진행하는 만큼 국가적 차원의 제도 지원도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 회장은 “대만·미국에 비해 반도체 시설투자에 대한 허가 절차가 상당히 까다로워 분초를 다투는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국가 기관의 적극적 협의로 반도체특별법을 하루빨리 마련해 국내 기업을 지원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