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일본·유럽 등 글로벌 강국들이 자국 중심의 반도체 가치사슬을 강화하는 가운데 중국이 최첨단 메모리 반도체 기술 인력 확보전에 나섰다. 극자외선(EUV)·하이케이메탈게이트(HKMG) 공정 등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최첨단 메모리 반도체 제조에 활용한 기술을 구현해 한국의 메모리 시장 주도권을 빼앗고 미국 등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이 과정에서 차세대 기술을 선도하는 한국 반도체 인재들을 중국에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2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중국 메모리 업체인 창신메모리(CXMT)는 유력 채용 사이트에 EUV 기술 전문가를 채용한다는 공고를 올렸다. CXMT는 EUV 기술 가운데서도 웨이퍼 위에 회로를 찍어내는 데 필요한 필수 소재인 ‘마스크’ 분야 전문가를 찾고 있다. 회사는 공고에 “8년 이상 마스크 개발을 담당한 전문가를 찾는다”며 “EUV 마스크 기술에 친숙한 사람이 자격 요건”이라고 명시했다.
EUV 기술은 웨이퍼 위에 빛으로 회로를 반복적으로 찍는 노광 공정 중에서도 최첨단 기술로 꼽힌다. 세계 1, 2위 D램 업체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모리 반도체에 선도적으로 적용했다.
HKMG 공정 전문가를 모집하는 공고도 포착됐다. HKMG는 삼성전자가 올 3월 DDR5 D램을 발표하면서 업계 최초로 메모리 반도체에 적용한 공정이다. 반도체 회로가 좁아질수록 누설 전류가 많이 발생하는데 HKMG는 누설을 최소화할 수 있는 핵심 기술이다.
중국은 현재 미국과의 극심한 무역 분쟁으로 EUV 등 최첨단 장비와 기술들을 현지에서 쉽게 활용할 수 없어 ‘반도체 굴기’ 실현에 제동이 걸린 상황이다. CXMT는 EUV나 HKMG 공정을 당장 도입해야 할 만한 기술 수준은 아니지만 격화하는 세계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선제적 인력 확보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다수의 국내 반도체 회사 출신 반도체 엔지니어가 CXMT·양쯔메모리(YMTC) 등 중국 주요 메모리 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美 중심 공급망 재편 위기감…中, 인력·장비 닥치는대로 삼킨다
중국 창신메모리(CXMT)의 극자외선(EUV) 기술 전문가 채용 공고는 각종 악재 속에서도 ‘반도체 굴기’ 야욕을 꺾지 않겠다는 중국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CXMT는 중국 안후이성 허페이에 본사를 둔 D램 제조 업체다. 현재 이 회사가 주력으로 양산하는 D램은 19나노 D램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전자의 14나노 D램, SK하이닉스의 10나노급 4세대(1a) D램보다 3세대 뒤처진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CXMT가 궁극의 반도체 기술로 불리는 EUV를 자사 공정에 도입하려면 아직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업계 중론이다. EUV 노광 기술은 기존 불화아르곤(ArF) 빛보다 14분의 1 짧은 13.5㎚ 파장으로 회로를 더 얇고 반듯하게 찍어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물질에 흡수되는 EUV의 까다로운 성질 때문에 기술 구현이 상당히 어렵다. 대당 1,500억 원을 호가하는 ASML의 EUV 장비를 운영하는 비용도 만만찮다.
세계 D램 시장 1·2위를 차지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최근에야 EUV 기술을 D램 양산 공정에 도입했다. 따라서 CXMT가 이 기술을 구현하려면 수많은 기술적 난제와 시간을 극복해야 한다는 평가다.
더구나 중국을 둘러싼 대외 환경은 첨단 반도체 기술을 개발하기에 상당히 불리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올 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 정부의 중국 반도체 견제 수위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미국 정부의 제재로 EUV 노광 장비를 세계에서 단독으로 공급하는 ASML은 이 장비를 중국으로 한 대도 수출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EUV 장비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관련 요소 기술 개발이 수월하게 진행될 리 만무하다.
게다가 미국 중심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동맹이 강화되는 추세다. 미국 인텔이 유럽에 110조 원을 투자해 새로운 반도체 공장을 짓고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8,000억 엔(약 8조 원)을 일본 신규 D램 제조 설비에 투자하고 있다. 중국에서 2개 공장을 운영 중인 세계 최대 업체 TSMC도 중국 리스크를 우려해 일본에 팹을 건설하며 ‘반중국 반도체 동맹’에 참여했다.
◇美·中 반도체 전쟁 ‘전면전’
이러한 위기 속에서 중국 업체가 고난도 D램 공정 기술 인력 채용에 나서는 것은 중국이 세계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쉽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또 중국 업체들은 지속적으로 고급 인력 확보를 시도할 뿐 아니라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장비도 ‘싹쓸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중국 반도체 산업 제재 수위가 더욱 높아질 것을 고려해 전후 공정 장비를 가리지 않고 생산능력 확대 계획과 상관없이 입도선매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움직임에 반도체 수요 폭증에 대응하던 국내 반도체 대기업들도 상황을 예의 주시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향후에도 중국은 세계 반도체 패권 싸움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과감한 투자를 할 것이라는 업계 해석이 나온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 정부가 절대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공급망 재편대로 움직일 리 없다”며 “현지 부품·소재 자급률을 70% 이상으로 끌어올리려는 ‘제조 2025’ 목표 달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中 ‘물밑 스카우트’ 잇따라
중국은 최첨단 메모리 공정을 확보하기 위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굴지의 반도체 회사에서 근무하는 국내 인력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이번 EUV·HKMG 개발 인력 모집 공고에서 최소 5~8년 이상의 경력을 보유한 사람을 찾는 것으로 미뤄봤을 때 글로벌 시장을 이끄는 국내 양대 기업에서 반도체 기술을 다뤄본 경험을 우대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중국 반도체 업체들은 주로 물밑에서 한국 엔지니어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2019년 중국 D램 업체 푸젠진화가 경력 직원 모집 공고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의 업무 경험을 언급한 사례, 각종 국내 채용 사이트에서 대놓고 반도체 경력 사원을 채용하려는 사례 등이 곳곳에서 보여지고 있다. 이미 CXMT·YMTC 등 중국 유력 반도체 업체에는 다수의 한국 출신 엔지니어가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국내 인력의 중국행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기술 보안에 치명타가 될 수 있지만 이들의 직업 선택을 제한하거나 막을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국내 엔지니어를 보호하기 위해 이들을 존중하고 예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고급 기술을 가진 인력들이 한국에 남아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국가 차원에서 기술자를 존중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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