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12월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가 ‘일반적 표시와 공시’ 공개 초안을 발표하자 국내 회계 전문가들은 충격을 받았다. 손상차손·처분손실·외환손익, 나아가 파생 상품 손실까지 한꺼번에 영업 비용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영업손익’ 개념이 현재 기준과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가령 코스닥시장에서 관리종목 지정, 상장폐지 요건을 따질 때 영업 손실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록했는지 따진다. 이에 따라 한국회계기준원은 지난해 5~8월 국내 개인·기관을 대상으로 이 공개 초안에 대해 의견을 구했다. IASB에 우리나라의 의견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접수된 의견은 고작 3건이었다. 기준원 관계자는 “기업 담당자 입장에서는 일상 업무가 많다 보니 공개 초안에 의견을 내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나라가 2011년 상장사들에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K-IFRS)을 전면 도입한 지 10년이 지나고 있지만 이해관계자들은 국제회계기준(IFRS) 제·개정 관련 의견 개진에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에서 회계기준과 관련한 ‘공론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진단이다. 전문가들이 회계기준 관련 ‘거버넌스’ 개선을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2일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실이 금융위원회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7~2020년 한국회계기준원이 IFRS 제·개정안 공개 초안에 대해 국내에서 받은 의견은 건당 1~7건에 불과했다. 우리나라만의 특수성이 IFRS에 잘 반영되지 않아 국익이 훼손될 우려가 크다는 의견이 제기되는 이유다. IFRS 제·개정 과정에서 IASB에 얼마나 의견을 잘 전달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IASB는 주요 회계 이슈를 연구한 뒤 공개 초안을 공표한다. 공개 초안 단계에서 IFRS 채택 국가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기준원도 공개 초안 쟁점을 정리한 뒤 국내 기업·협회에 알린다. 이후 IASB는 각국에서 받은 의견을 바탕으로 IFRS 개정안을 내고 기준원·금융위는 다시 이를 토대로 K-IFRS를 제정한다.
전문가들은 자사에 치명적인 이슈가 아니라면 국내 기업들이 회계기준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특히 국내 업계에서 단독으로 목소리를 낸다 해도 IASB를 주도하고 있는 영국·유럽연합(EU) 국가들의 목소리가 더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무력감도 깔려 있다. 보험 부채를 원가 대신 시가로 평가하도록 한 IFRS17의 경우 국내 보험업계의 요구대로 시행 시점이 기존보다 2년 늦춰진 2023년으로 확정됐지만 이 역시 해외 보험업계와의 ‘공동 대오’가 아니었다면 달성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 단독으로 목소리를 냈다면 의견을 관철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회계기준에 대한 국내 이해관계자들의 소극적 태도를 타개할 돌파구를 회계 기구 역량 강화, 나아가 ‘회계 거버넌스’ 개편에서 찾는다. IFRS에서는 정부 주도의 K-GAAP 체제와 달리 각 이해관계자의 의견 수렴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회계기준은 매우 전문적인 분야라 회계 기구와 국내 기업 간 적극적인 의사소통이 필수적이다. 특히 IFRS 제·개정에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히기 때문에 정부에서 회계 기구 개편을 통해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기준원 조직 확대안이 대표적인 대안으로 거론된다. 현재 기준원은 20여 명의 인력이 질의 회신, 조사, 기준 제정 활동을 모두 담당한다.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우려가 제기돼온 이유다. 한종수 이화여대 경영대학 교수는 “IFRS 제·개정에서 목소리를 내려면 우리나라와 비슷한 사정을 가진 나라를 찾고 개정안 내 문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며 “기준원 안에 회계 관련 연구원을 두고 우리나라만의 논리를 적극 발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윤창현 의원도 “우리 기업이 직접 IASB에 회사의 사정을 담은 전문 의견을 건의하는 데는 한계가 많다”며 “기준원의 조사·분석 기능을 강화하는 등 우리 기업의 현장 목소리를 국제기구에 전달할 수 있는 공공 거버넌스 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회계심판원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전문가 조직의 권위적 판단을 바탕으로 기업, 감독 기구 간 의견차를 흡수할 수 있는 데다 회계 이슈 관련 쟁점을 학술적으로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PCAOB처럼 회계 이슈만 담당하는 조직을 갖춰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기준원과 금융감독원 회계 담당 부서를 통합하자는 제안이 나오는 배경이다. 정도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금융 당국에서 회계는 밑단으로 두는 경향이 강한데 독립된 조직이 생기면 회계 이슈를 적극 발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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