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설립된 스웨덴 배터리 업체 노스볼트는 유럽 내에서 전기차 배터리 산업의 ‘맹아’ 대우를 받는다. 세계 최대 완성차 업체인 폭스바겐의 글로벌 전기차 전략 핵심 파트너로서 빠르게 기술을 축적해나가고 있다. 유럽연합(EU) 차원의 지원도 뒤따른다. 국내 배터리 업계는 이 같은 노스볼트의 급성장 배경에 한국 연구개발(R&D) 인력이 있다고 의심한다. 실제 노스볼트는 지난해 자사 홈페이지에 “30명 이상의 한국인과 일본인 기술자들이 일하며 배터리 연구팀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가 기술 유출 논란이 일자 뒤늦게 이를 삭제하기도 했다.
인공지능(AI), 5세대(5G) 이동통신, 최첨단 반도체, 친환경 자율주행차 등 분야를 막론하고 전 세계적으로 산업 재편의 빅뱅이 이뤄지고 있다. 과거에는 개별 기업의 사업 포트폴리오 전환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최근에는 국가 대항전 성격이 강해졌다. 미국이 반도체·배터리·의약품·희토류 등 4대 품목에 대한 공급망 강화에 나선 것처럼 일본과 중국·EU도 정책 역량을 쏟아부어 미래 산업 기술 선점에 뛰어들었다. 기술 선점의 핵심은 인력 확보다. 기존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며 융합 흐름이 뚜렷해진 점도 인력 쟁탈전의 배경으로 꼽힌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우수한 R&D 인력들이 집중 영입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산업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래 자동차 산업은 인재 쟁탈전이 격화하는 대표적인 분야다. 있다. 중국과 일본 업체들이 고액 연봉을 미끼로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의 고급 인력 스카우트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들 국가의 차량용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평균 연봉은 약 20만 달러(약 2억 2,300만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몇몇 업체는 어학 교육비, 주택 보조금, 자녀 교육비 지원 등 파격 조건으로 유혹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내와 해외 업체 간 연봉 격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연차가 낮은 직원들을 중심으로 해외로 이직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분야는 인력 빼가기가 더 치열하고 노골적이다.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중국은 수년 전부터 한국 반도체 인력 빼가기에 혈안이 돼 있다. 최근 한 헤드헌팅 업체는 중국에서 근무할 D램 전문가를 물색하면서 ‘S사(삼성전자), H사(SK하이닉스) 관련 근무자’를 우대 조건으로 내세웠다. 중국 칩 설계 업체인 유니SOC는 경력 직원 채용 조건에 아예 ‘삼성전자·SK하이닉스 근무 경력을 우대한다’고 못 박았다.
최근의 글로벌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가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면서 국내 인력 유출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진출을 선언한 인텔은 최근 삼성전자 미국법인 파운드리 부문에서 일하던 하오 홍을 파운드리 서비스 글로벌 비즈니스 개발 담당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눈에 보이는 인력 채용도 활발하지만 최근에는 공식적인 채용보다 ‘007 작전’하듯 소리 소문도 없이 사람을 빼가는 경우가 더 많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탈원전 정책에서 비롯된 국내 원전 전문가들의 해외 유출에 대한 우려도 크다. 전 세계적으로 기후변화 대응 수단으로 원전이 각광받고 있는 흐름과 맞물려 인력 유출이 본격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원자력산업협회에 따르면 원자력 산업 인력은 2016년 3만 7,232명에서 2019년 3만 5,469명으로 1,763명 줄었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탈원전 정책이 본격화한 후 한전기술 등에서 인력 유출이 두드러졌다”며 “2018년부터 2년간 100여 명이 연봉 2배 정도를 받고 아랍에미리트(UAE) 등으로 넘어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SK이노베이션에서 배터리 R&D를 총괄하던 임원이 현대모비스 등을 거쳐 중국 헝다그룹으로 옮기기도 했다. 중국 부동산 재벌인 헝다그룹은 전기차 시장에도 진출해 있다. 국내 배터리 3사 인력들이 대거 헝다그룹으로 이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력 산업 분야의 인력 엑소더스가 벌어지면서 자칫 국내 액정표시장치(LCD) 인력들이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로 유출돼 LCD 분야에서의 추격을 허용했던 과거 사례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중국 업체인 BOE는 2000년대 들어 한국 기업 인수와 인력 확보로 경쟁력을 키워 현재 글로벌 LCD 1위에 올라 있다.
이 때문에 산업계에서는 핵심 산업 인재를 파격적으로 우대해줄 수 있는 국가적 고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제조업 분야의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기술 경쟁이 개별 기업 간에 벌어지는 사안이었다면 이제는 국가가 직접 나서서 경쟁하는 흐름으로 바뀌었다”며 “핵심 인재를 육성만 할 게 아니라 국가가 이들을 관리해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재영 기자 jyhan@sedaily.com, 한동희 기자 dwise@sedaily.com, 곽윤아 기자 ori@sedaily.com, 세종=김우보 기자 ub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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