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휘트니 뮤지엄은 지난 1930년 거트루드 반더빌트 휘트니(1875~1942)에 의해 설립된 현대미술관으로 3,500여명 아티스트의 작품 2만5,000점 이상을 소장하고 있다. 1973년 시작한 ‘휘트니 비엔날레’를 통해 제프 쿤스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을 발굴해 스타덤에 올려놨는가 하면 에드워드 호퍼·조지 오키프·앤디 워홀·재스퍼 존스 같은 20세기 미국미술의 거장들을 상설전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 지금 에티오피아계 미국작가인 줄리 메레투(Julie Mehretu·51)의 회고전이 한창이다.
메레투는 부산비엔날레와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국내 소개된 적 있으나 제대로 개인전이 열린 적은 없다. 지난해 ‘타임’지가 선정한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100인에 들 정도로 국제적 입지가 탄탄한 작가다. 이번 전시는 그가 1996년부터 제작한 드로잉·회화 등 총 60여 점이 연대기 순으로 3개 섹션으로 나뉘어 선보이고 있다. 각 섹션들은 미국, 아프리카, 유럽 등 작가가 거주했던 지리적 위치 변화를 되짚으며 정치·사회적 이슈가 어떻게 작품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첫 번째 섹션에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 태생의 작가가 미국으로 이주해 작업한 초기 유기적 형태의 그림과 드로잉들이 전시돼 있다. 흑연과 잉크로 그린 당시 드로잉에서는 현재 작업의 밑바탕이 된 여러 가지 시각적 형태의 점·선·화면 구성에 대한 연구 흔적이 엿보인다.
두 번째 섹션에서는 1999년부터 뉴욕에 거주하면서 시작된 작가의 변화가 잘 드러난다. 적극적으로 다양한 원색들을 사용하며 거대한 스케일의 캔버스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초기 작업들이 작은 점과 선들이 반복돼 하나의 덩어리를 형성하는 드로잉 위주였다면,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이러한 요소들을 겹겹이 쌓아 올리면서 새로운 복합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이와 더불어 캔버스 곳곳에서는 잉크로 그려진 건축물들의 이미지와 만화에서 볼 수 있을 법한 과장된 시각적 표현 요소들을 볼 수 있다. 명확한 형태를 가지는 구상 회화도 아니고 추상화라 단정짓기에도 애매모호한 메레투의 그림은 그러나 다채로운 색·점·선·면, 다양한 문화에서 비롯한 건축물들의 형태들이 한 화면에 뒤엉켜 굉장히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2001년작 ‘Retopistics: A Renegade Excavation’는 이러한 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가로 5.3m 세로 2.6m의 거대한 그림에서 다양한 시점에서 본 도시의 풍경들이 조합돼 다이내믹한 공간을 새롭게 창출한다.
마지막 섹션은 본격적으로 작가가 정치, 사회적 이슈의 이미지들을 자신만의 추상적인 이미지로 편집해 재창출해내는 작업 과정을 보여준다. 2016년작 ‘Epigraph, Damascus’는 화염에 휩싸인 불꽃이나 겹겹이 쌓여져 있는 웅장한 바위산들의 산맥이 연상된다. 6개의 독립된 패널로 이뤄졌으며 19세기에 널리 사용된 포토 그라비어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그래서 동양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다양한 농도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외관으로는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는 이 추상성 안에는 실상 아프리카·중동의 뿌리 깊은 내전과 종교분쟁에 대한 관심이 깔려 있다. 작가는 2010년 말에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발생한 반정부 시위운동 ‘아랍의 봄' 이 발생했을 당시 큰 타격을 입었던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 주목했다. 그녀는 다마스쿠스의 사진을 불명확한 이미지로 흐리게 하고 그 위에 다마스쿠스의 시내 건축물들을 간결하게 잉크로 그려 놓았다. 흐릿한 다마스쿠스 이미지는 아직도 분쟁이 끝이지 않는 위태로운 상황을, 앙상하게 그려진 그곳의 시내 건축물들은 그 화염 속에서 위태롭게 뼈대로 남아있는 시민들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처럼 작가는 사회적 이슈가 발생하는 시점, 장소와 관련된 이미지를 작품의 재료로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앤디 워홀도 1964년작 ‘Race Riot(인종폭동)’에서 흑인 인권운동을 무차별적으로 탄압한 경찰 이미지를 신문에서 차용해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작품화 했다. 메레투는 단순히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을 넘어, 더 많은 문맥들을 작품 속 이미지들에 도입한다. 전시된 2018년작 ‘Hineni (E.3:4)’는 히브리어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Here I am)'는 뜻이다. 이 말은 모세가 불꽃이 이는 가시덤불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한 땅으로 이끌고 가겠다며 여호와에게 응답한 말이다. 작가는 언론사가 촬영한 2017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거대한 산불 현장 사진을 차용해 초점을 흐리게 한 뒤 180도 뒤집어 자신의 캔버스에 사용했다. 이처럼 작가는 ‘불’과 관련된 복합적인 의미를 자신의 언어로 재조합해 새로운 문맥을 창조했다. 전시는 8월8일까지 열린다. /글·사진(뉴욕)=엄태근 아트컨설턴트
※필자 엄태근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뉴욕 크리스티 에듀케이션에서 아트비즈니스 석사를 마친 후 경매회사 크리스티 뉴욕에서 근무했다. 현지 갤러리에서 미술 현장을 경험하며 뉴욕이 터전이 되었기에 여전히 그곳 미술계에서 일하고 있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