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가 토종 시스템 반도체 업체에 차량용 반도체 사양을 공유하는 등 관련 제품 국산화 협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당장 직면한 차량용 반도체 수급 문제 해결과 함께 향후 지속될 반도체 수요 폭증을 대비한 공급망 다변화까지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국내 최대 자동차 업체의 내재화 시도로 그간 수요처 찾기에 골몰했던 토종 시스템 반도체 업계에 긍정적 영향이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탄탄한 차량용 반도체 인프라 구축을 위해 28나노(㎚) 이상 파운드리 투자에도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차량용 반도체 국산화 작업에 속도를 올리는 주요한 배경은 세계적으로 심화하고 있는 차량용 반도체 부족 현상이다.
올 초부터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는 차량 제조에 활용하는 반도체 부족으로 전례 없는 수급 대란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말 자동차 수요 회복이 업계 예상을 상회할 만큼 가파르게 진행되면서 급격한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언택트’ 붐에 대응하기 위해 정보기술(IT) 기기용 칩 생산에 주력하고 있던 차량용 반도체 업체와 파운드리 업체들이 부랴부랴 자동차 고객사 수요에 대응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상황은 진정되지 않는 분위기다. 주요 차량용 반도체 업체인 스위스의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는 지난달 초 열린 올 1분기 실적 발표회에서 “차량용 반도체 주문량이 1년 6개월 치 밀려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제너럴모터스(GM)·포드 등 내로라하는 완성차 업체들은 생산 라인 가동을 중단했다. 현대차도 이 위기를 피해갈 수 없었다. 지난 24~26일에는 차량용 반도체 수급 문제로 자동차 3,096대 생산을 일시 중단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게다가 이 현상은 차량용 반도체 공급사가 한정돼 있어 더욱 극복이 쉽지 않다. 이 시장은 네덜란드 NXP, 독일 인피니언, 일본 르네사스,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등 5개 업체가 80% 이상 점유하는 등 소수 업체가 과점하고 있다. 현대차도 차량용 반도체의 95%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현대차는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 국내 업계와 협력해 차량용 반도체 내재화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당면한 수급 문제를 해결하면서 현재 자동차 한 대당 200~300개 수준에서 2,000개 이상 적용될 것으로 예상되는 차량용 반도체 수요에 대비해 높은 해외 의존도를 낮추는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현대차는 “국내 반도체 업체들에 완성차에 필요한 목록을 일부 공유한 바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사양을 공유한 일은 없다”고 설명했다.
현대차와 토종 반도체 업체 간 협력이 가시화하면 열악했던 국내 시스템 반도체 업계에도 훈풍이 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완성차 및 차량 모듈 업체들의 차량용 반도체 수요에 대응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텔레칩스는 최근 28나노 기반 차량용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 개발을 완료하고 제품을 출시했다. 인포테인먼트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가 주력이었던 텔레칩스는 MCU 시장에도 진출하면서 자동차 업체와 협력 기회를 늘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올해 LG그룹 계열사에서 LX그룹으로 편입된 실리콘웍스는 새롭게 꾸린 MCU사업실에서 차량용 반도체 개발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가전용 MCU 업체였던 어보브반도체의 전장용 반도체 진출 움직임도 주목된다. 또 전력 반도체 분야에서도 예스파워테크닉스와 파워마스터반도체가 추후 완성차 업체와 협력할 수 있을지 관심을 끌고 있다.
현대차그룹과 국내 시스템 반도체 업계의 협력 타진은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이들의 칩을 만드는 파운드리 인프라도 충분히 갖춰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재 자동차 반도체가 주로 생산되는 8인치 웨이퍼용 파운드리 외에도 28~60나노 사이를 만족하는 미들엔드급 12인치 파운드리가 크게 부족하다는 것이 시스템 반도체 업계의 지적이다. 차량용 반도체 부족 문제가 파운드리 공급 부족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만큼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투자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서규 한국시스템반도체포럼 회장은 “국내에 14나노 이하 첨단 파운드리 라인은 잘 갖춰지고 있지만 28나노 이상 라인이 크게 부족해 설계 업체들이 여전히 해외 파운드리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차량용 칩 설계 협력은 물론 파운드리 투자도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해령 hr@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