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6년 타이베이에서 한·대만 간 산업 정책 세미나가 열렸다. 당시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원장이던 필자는 한국 대표단을 이끌고 회의에 참석했다. 원로 경제학자이자 대만 측 대표로 참석한 챙소치에 중화경제연구소장은 개회사에서 반도체 산업에 도전장을 낸 이병철 삼성 회장의 기업가로서의 ‘동물적 감각’을 높게 평가하며 그렇지 못한 대만 기업인을 비판했다. 필자를 비롯한 한국 대표단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당시 한국은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삼성의 반도체 사업 참여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반도체 사업은 신제품 개발 선두 주자에는 큰 이익을 주나 후발 주자에는 반도체 가격 폭락으로 재앙이 된다는 것이 당시 전문가들의 주장이었다. 여기에는 삼성이 당시 반도체 분야 선두 주자인 일본 기업을 앞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선입견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대로다. 전문가의 예측은 틀렸고 이 회장의 ‘동물적 감각’은 맞았다. 이것이 삼성전자 ‘제1의 도약’이었다. 만약 그때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이라는 브랜드는 없을 것이다. 반도체 사업의 유무는 전자 산업 부문에서 삼성과 LG 간 격차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 됐다. LG 역시 오래전부터 반도체를 갖고 있었으나 외환위기 직후 김대중 정부는 ‘기업 구조 조정’이라는 명분으로 이를 빼앗아 현대에 줬다. 그러나 대북 경협 등 무리한 사업 확대로 경영난에 직면한 현대는 반도체 사업을 포기했고 결국 SK가 이를 인수해 지금의 SK하이닉스가 됐다.
이런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서 삼성전자 ‘제2의 도약’이 시작됐다. 삼성은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꿔라”라는 고 이건희 회장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신(新)경영 선언대로 세계시장에서 1·2등 가능성이 없는 사업을 과감히 정리했다. 2002년 서울에서 열렸던 스탠퍼드대 동문회 주최 ‘하이테크 기술 심포지엄’ 후 필자는 참가자들과 함께 삼성 반도체 공장을 견학했다. 오찬 자리에서 스탠퍼드대의 노교수가 옆에 앉은 삼성의 젊은 중역에게 “삼성이 일본 소니를 따라잡은 비법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중역은 “외환위기 이후 삼성은 열심히 구조 조정을 했는데 소니는 그렇지 않았다”고 답했다. 삼성이 ‘제2의 도약’에 성공한 것은 위기에서 보인 이 회장과 삼성 임직원들의 결의가 소니 등 경쟁자들보다 더 강했기 때문이었다.
최근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반도체 수요가 폭발해 공급 부족 사태가 발생하면서 세계는 지금 ‘글로벌 반도체 전쟁’ 시대를 맞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반도체 대책 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를 초대해 미국 내 투자 확대를 요구했다. 중국의 위협에서 국가의 존폐를 미국에 의존해야 하는 TSMC는 향후 3년간 미국 생산 라인 증설에 120억 달러(약 13.5조 원)를 투자하는 계획을 이미 천명했다. 삼성전자 역시 이번 한미정상회담에 맞춰 170억 달러의 미국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반도체 최대 시장인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국의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가 경쟁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반도체 전쟁’은 반도체 분야 선두 주자인 인텔에도 큰 자극제가 됐다. 2월 새로 취임한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는 대규모 투자 계획을 연달아 발표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3의 도약’은 ‘글로벌 반도체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이뤄야 한다.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이 영어의 몸이라 신속한 의사 결정이 어렵다는 난관도 극복해야 한다. 뒤늦게나마 반도체의 중요성을 인식한 정부가 최근 ‘K반도체 전략’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있어 다행이다. 그러나 ‘제3의 도약’의 성패는 삼성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달려 있다. 삼성의 ‘제3의 도약’이 성공하기를 기원한다.
/여론독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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