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개혁은 흔히 ‘코끼리 옮기기’에 비유된다. 덩치가 커 주목을 받고 둔해서 움직이기 어려운 게 닮아서다. 개혁 방향과 관련해 ‘더 내고 더 받느냐’와 ‘덜 내고 덜 받느냐’를 두고 갑론을박하지만 그대로 받더라도 더 내야 하는 것이 국민연금의 불편한 진실이다. 현재의 재정 구조는 세계 최고 속도의 저출산·고령화로 미래의 지출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금 고갈 시기도 2060년→2057년→2054년으로 점점 앞당겨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고갈 이후 대책은 전혀 없다. 올해 제11대 한국연금학회장을 맡은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대표적인 재정 안정론자로 통한다. ‘더 내고 덜 받자’고 주장하는 그는 스스로를 “10여 년 동안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했다”고 소개했다. 윤 학회장은 문재인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이 좌초한 후 공적 연금이 처한 구조적 문제를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지난달 공적 연금 개혁을 촉구하는 학회 웹 세미나를 개최한 것도 그 일환이다. 6일 서울경제 회의실에서 만난 윤 학회장은 국책연구기관 소속 연구자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톤이 높았다.
-국민연금 고갈 시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학회 인구분과 소속 전문가들은 지난해 0.84명으로 낮아진 합계출산율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여파로 올해 또는 내년에 0.7명대로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2018년 4차 연금 재정 추계는 2015년 (출산율 1.24명) 통계 기준인데 지금 상황은 너무 달라졌다. 출산율이 떨어지고 기대여명이 늘어나는 만큼 다음 추계 시기인 오는 2023년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특별 추계가 필요하다. 통계청은 2019년 장래 인구를 특별 추계했다. 재정 추계 주기를 현행 5년에서 3년으로 단축하는 방안도 검토해볼만하다.
-연금 재정 추계는 70년 뒤를 본다. 해외는 어떤가.
△일본은 100년 뒤를 본다. 캐나다는 150년 단위다. 기대수명이 83세인데도 2003년 1차 재정 추계 때 기준을 그대로 쓴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재정 추계는 70년 뒤, 다시 말해 2088년까지 보는데 왜 고갈 이후에는 아무런 공식 지표가 없는가.
△불편한 진실을 감추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미적립 부채다. 국민연금 적립금은 833조 원(2020년 기준) 쌓여 있지만 미적립 부채는 1,500조 원가량(2019년 기준)으로 추정된다. 가입자에게 언젠가 지급해야 하는데도 쌓지 못한 돈이다. 이는 연금 고갈 이후 세금으로 메우든지 아니면 후대의 가입자가 보험료를 더 내야 한다는 의미다. 추계 마지막 연도인 2088년에는 국민연금 누적 적자가 1경 7,000조 원에 이른다. 이런 섬뜩한 통계는 정부가 공개한 것이 아니라 20대 국회 당시 보건복지위원장인 김세연 의원이 정부로부터 받은 자료를 일일이 합산한 것이다. 통계부터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개혁의 출발점이 된다.
국민연금 고갈론 꺼내면 ‘공포 마케팅’ 프레임 씌워
-기금 고갈 이후 연금제도를 유지하려면 얼마나 부담해야 하나.
△보험료율을 현재(9%)의 세 배인 29%쯤으로 올려야 한다. 이것도 낙관적 시나리오다. 저출산· 고령화 속도를 고려하면 30%를 훌쩍 넘을 것 같다. 이뿐인가. 소득세와 의료보험료 등을 합치면 소득의 절반쯤을 떼야 할 것이다.
-연금 고갈 시점이 먼 미래인데 나중에 개혁해도 된다는 주장도 있는데.
△전형적인 개혁 물타기다. 현 정부에서 득세한 노후소득보장론자들이 그렇게 말한다. 재정 고갈 문제를 꺼내기만 하면 ‘공포 마케팅’ 프레임을 씌운다. 개혁을 미루는 것은 미래 세대에게 빚 폭탄을 떠넘기는 꼴이다.
-국가의 지급 보장을 법제화하자는 지적도 있다.
△신중해야 한다. 지급 보장을 법으로 명문화하면 개혁 추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나라가 책임진다는데, 세금으로 메우지 왜 더 부담해야 하느냐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다. 법제화의 실효성도 없다.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연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해외에서도 국가지급보장을 명문화한 사례가 거의 없다. 흔히 해외의 명문화 사례로 독일을 들지만 유동성 문제가 해결되면 국가에 반환하도록 돼 있다.
-2018년 정부의 연금 개편 방안을 평가한다면.
△2003년 1차 연금 재정 추계 때부터 지금까지 네 차례 모두 참여했는데, 최악이었다. 연금제도발전위원회 구성 자체부터 편향성이 심했다. 현 정부가 노후 소득 보장 강화에 방점을 찍다 보니 민간 위원 12명 가운데 경제학자 출신은 나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사회복지 쪽이었다. 과거에는 경제학자가 30~40%쯤 됐다. 이러다 보니 논의 구조가 재정 안정보다 급여 확대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연금 개혁 논의를 하면 늘 정부·정치권과 어용 지식인이 카르텔을 형성해 개혁 물타기를 한다. 정치적 영향력이 큰 노동 단체 등 이해 집단은 기득권 방어에 몰두하고 정부는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2018년 개편 논의 때 특히 심했다. 이는 제도의 지속 가능성과 연금의 탈정치화라는 글로벌 트렌드와 정반대다.
-노후 빈곤을 막기 위해 소득대체율을 올리는 게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소득대체율을 올리면 노후 빈곤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은 허구다. 연금조차 가입하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광범위하다. 게다가 저소득층일수록 연금 가입 기간이 짧다. 이는 소득대체율을 올리면 노후 소득 불평등을 초래한다는 의미다. 흔히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다지만 여기에는 착시 현상이 있다. OECD 기준은 가처분소득이다. 보유 자산을 반영하면 우리나라가 결코 낮은 편이 아니다.
소득대체율 올리면 노후 빈곤 막는다?…되레 불평등 심화
-국민연금이 ‘국민 용돈’이라는 불만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는 요율 9%에 대체소득률 44%(2028년 40%)다. OECD 평균 요율이 20%쯤 되지만 대체소득률은 우리와 엇비슷하거나 약간 높다. 더 받으려면 훨씬 더 많이 내야 한다. 정부의 (실패한) 개편 방안에는 기금 고갈 이후에 대해 아무런 대책이 없다.
-정부안 4개 가운데 요율 인상을 전제로 한 3안(요율 12%, 소득대체율 45%)과 4안(13%, 50%)도 있다.
△고갈 시기가 몇 년 연장된다고 해서 개혁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3안은 기금 고갈 이후 보험료율을 36.6%로 인상해야 소득대체율 45%를 유지할 수 있다. 4안은 보험료율을 40.7%까지 올려야 한다. 이게 개혁이라고 할 수 있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도록 고치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다.
-대선 공약이 소득대체율 인상이었다. 정부가 애초부터 개혁 의지가 없었던 것 아닌가.
△문재인 대통령이 정부 초안을 보고받고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며 전면 재검토를 지시했다. 보험료를 올리지 않겠다는 의미다. 국민 눈높이 개혁이라는 게 도대체 뭔가. 국가 리더의 역할은 제도에 내재된 문제와 실상을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고 객관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국민을 설득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해외의 여러 나라가 정권 잃을 각오를 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스웨덴과 독일이 그랬다.
-문 대통령은 대선 당시 국민 부담을 늘리지 않고도 소득대체율을 높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런 묘수가 있는가.
△없다. 대선 캠프에 참여한 인사들이 잘 모르는 사람(문재인 후보)에게 그런 정보를 제공했을 텐데, 역사적으로 반드시 추궁해야 한다. 5년짜리 공약을 만든 ‘폴리페서(polifessor·정치 참여 교수)’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동북아 3개국의 연금 지형을 보면 우리나라는 개혁 강도가 제일 낮고 미래 대비가 가장 허술하다. 일본은 100년 뒤에도 1년치 지급할 돈을 쌓아두고 있다. 중국도 보험료율이 16%에 이른다.
-보험료 인상을 좋아할 사람은 없는데.
△연금 포퓰리즘의 포로로 잡힌 게 문제다. 정권을 잡으면 달콤한 것에만 취하지 말고 국가 절체절명의 과제를 어젠다로 설정해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연금제도를 제때 고치지 않아 골든타임을 놓치면 대한민국호가 바닷속에 가라앉을 지경이 된다는 점을 대통령부터 직시해야 한다. 불편한 진실을 숨기고 국민이 좋아하는 것만 따라가면 되겠는가. 책임 있는 정부라면 적립금이 최대 1,700조 원까지 쌓인다고 할 것이 아니라 수면 아래에 있는 미적립 부채와 누적 적자를 어떻게 할 것인지 대답해야 한다. 전액 세금으로 지원되는 기초연금도 있다. 그런데도 그대로 내고 더 받자는 것은 집권 586세대가 미래 세대의 생선 뼈까지 발라먹겠다는 것이다.
-극단적 비관론이 아닌가.
△이대로 두면 외부로부터 고통스러운 개혁을 강요당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경제 주권까지 빼앗기는 최악의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멍 난 연금 재정을 정부 재정 적자의 절반치로 메우던 그리스가 그랬다. OECD는 2018년 한국보고서에서 국민연금 요율을 16%로 인상하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일반 정부 기준)이 2060년 100%쯤 되지만 그대로 놓아두면 200%가량으로 오른다고 경고했다. 국민연금만 놓고 보면 그렇다는 것인데 다른 변수를 고려하면 오죽하겠나.
-그럼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
△더 내고 덜 받도록 해야 한다. 지금처럼 받으려면 보험료율을 당장 18%로 올려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두 배 인상은 어렵다. 일단 요율을 13%가량으로 올린 뒤 핀란드처럼 기대수명 변화에 따라 지급액을 줄이는 ‘자동 재정 안정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연금제도를 어느 정도 지속 가능하도록 만든 뒤 후대가 따라오게 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요율을 몇 %포인트도 올리지 못하고서 후대에게는 두세 배씩 내라는 것은 무책임의 극치다.
/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He is…
1961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 고려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A&M대에서 미국 연금제도를 주제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사회보험실장·연금센터장 등을 역임하면서 공적연금제도를 연구하고 있다. 1~4차 국민연금 재정 추계 및 제도발전위원회 위원과 공무원연금 재정계산위원회 위원, 기초노령연금(현 기초연금) 재정추계위원장 등을 맡았다. 회원국 경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제검토위원회 연금 분야 한국 측 대표단으로 11년 동안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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