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룰은 바뀌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시작된 비트코인 상승 랠리에 대해 암호화폐 시장 전문가들은 지난 2017년 강세장과는 다르다며 이같이 강조한다. 짧은 시간에 비트코인의 가격이 급상승했다는 점은 유사하지만 가격 상승을 이끈 요인을 분석해보면 3년 전과는 확연히 다른 장세가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올 초 비트코인이 4,800만 원까지 치솟으며 순항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전문가들의 이 같은 분석은 힘을 얻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최근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첫 재무 장관 지명자인 재닛 옐런이 “비트코인의 사용을 규제해야 한다”고 발언한 후 비트코인 가격이 급락하자 3년 전 악몽이 되풀이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비트코인은 암화화폐기업공개(ICO) 광풍으로 2,800만 원까지 급등했다가 투기 우려가 불거지며 급락한 바 있다.
비트코인은 최근 하락세를 멈추고 다시 상승할 수 있을까. 아니면 3년 전 우울했던 상황으로 돌아갈 것인가. 해답은 최근까지 이어진 상승 랠리의 요인을 자세히 살펴보면 찾을 수 있다. 비트코인이 최근 주춤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처럼 시장이 일시에 폭락해 투자자들을 패닉에 빠뜨릴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옐런 지명자의 비트코인 규제 발언도 “비트코인이 돈세탁 등 불법 금융에 활용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실제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 시장은 3년 전과 비교해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수급 주체의 변화다. 2017년 강세장은 개인 투자자들이 주도했다. 하지만 이번 상승 랠리는 기관투자가들이 이끌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다.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를 ‘대체 자산’으로 취급하고 포트폴리오 투자의 일환으로 보는 투자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3년 전엔 인생역전 노린 개인이
너도나도 사고팔며 급등락 반복
지금은 글로벌 보험사·상장사 등
기관이 앞다퉈 매입·강세 이끌어
나스닥 상장사인 스퀘어와 마이크로스트래티지는 회사 자기자본으로 비트코인 투자에 나섰다. 지난해 마이크로스트래티지가 사들인 비트코인은 7만 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170년 역사를 가진 미국 보험사 매사추세츠 뮤추얼라이프 인슈어런스는 비트코인에 1억 달러(약 1,102억 원)를 투자했다.
암호화폐 투자 운용사인 그레이스케일은 지난해 4분기에만 총 33억 달러(약 3조 6,296억 원)의 자금을 모집했다. 이 중 기관투자가 물량이 90%가 넘는 30억 달러(약 3조 3,009억 원)다. 그레이스케일이 2013년부터 2019년 말까지 모집한 누적 금액은 12억 달러(약 1조 3,203억 원)다. 지난해 4분기에만 7년 누적 모집 금액의 3배에 달하는 자금이 몰렸다.
암호화폐 시장으로 기관들의 자금이 꾸준히 유입되자 미국 월가를 중심으로 비트코인이 금을 대체할 수 있다는 낙관론까지 등장했다. 세계 최대 자산 운용사 블랙록의 최고투자책임자(CIO)인 릭 리더는 “앞으로 비트코인이 금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씨티은행은 비트코인을 “21세기의 금”으로 표현하며 “올해 말이면 가격이 31만 8,000달러(약 3억 4,989만 원)까지 폭등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글로벌 투자은행(IB) JP모건체이스도 비트코인이 실물 금을 대체할 가치 저장 수단으로 인정받게 되면 장기적으로 가격이 14만 6,000달러(약 1억 6,061만 원)에 달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비트코인이 금과 비교되는 이유는 매장량과 발행량에 한계가 있어서다. 한국금거래소에 따르면 전 세계 금 보유 총량은 약 17만 8,000톤이다. 전 세계 매장량은 7만 톤 수준에 불과하다. 비트코인 역시 발행량이 2,100만 개로 제한돼 있다. 채굴량은 4년마다 절반으로 감소하도록 설계됐다. 현재 비트코인의 채굴량은 1,860만 개다. 오는 2140년이 되면 코인 채굴도 끝난다. 암호화폐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금과 비트코인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다는 점이 닮았다”며 “경제 위기 시 화폐가치가 떨어지고 금이 안전 자산으로 주목받는 것은 바로 이 희소성 때문이다. 비트코인도 금처럼 가치 저장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나친 낙관론은 경계해야 하지만 이런 전망은 비트코인의 중장기 수급에 호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비트코인 2140년이면 채굴 끝나
월가 일각선 '금 대체' 낙관론도
각국 규제·제도 정비 활발하지만
"변동성 커 투자 한계" 지적도 여전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 시장이 과거와 달라진 또 다른 이유는 금융 선진국들이 암호화폐 관련 규제와 제도를 정비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과도한 규제는 시장을 위축시키지만 시장 태동기에는 적절한 규제와 제도 마련이 선행돼야 시장의 무질서를 막고 산업을 안정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 실제 지난해 하반기부터 기관투자가들의 자금이 암호화폐 시장으로 유입된 배경으로 관련 규제 및 제도 정비가 꼽히기도 한다. 미국은 일찌감치 주 정부 차원에서 암호화폐 사업을 제도권 내로 편입시켰다. 뉴욕주의 경우 2015년부터 암호화폐 사업자를 대상으로 일종의 사업자 면허인 ‘비트라이선스’를 발급해왔다. 통화감독청(OCC)은 금융권 내 암호화폐 활성화를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시중은행이 고객을 대상으로 암호화폐 수탁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 은행이 법정화폐와 가치가 1 대 1로 연동돼 있는 암호화폐인 ‘스테이블코인’을 지급준비금으로 보유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일본은 2016년 자금결제법을 개정해 암호화폐를 결제 수단으로 인정했다. 2017년에는 암호화폐거래소가 금융청(FSA)으로부터 면허 승인을 받고 사업을 운영하도록 규정했다. 2019년에는 암호화폐의 성질이 결제 수단에서 투자 자산으로 바뀌었다고 판단, 자금결제법과 금융상품법을 한 차례 더 개정했다. 지난해 5월부터 시행된 개정안에 따라 암호화폐 파생 상품도 금융 상품으로 인정받게 됐다.
이처럼 각국의 규제가 마련됨에 따라 비트코인 투자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의 면모도 달라졌다. 2017년에는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활동하는 가상 자산 거래소가 투자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하지만 금융 선진국을 중심으로 가상 자산 제도가 정비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뉴욕증권거래소를 운영하는 인터콘티넨털익스체인지(ICE)는 기관투자가 대상의 암호화폐거래소 백트(Bakkt) 서비스를 개시했다. 스퀘어·페이팔 같은 테크핀 회사들도 비트코인 매매·보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비트코인의 변화한 위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암호화폐 시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시중에 풀린 막대한 유동성이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비트코인에 쏠린 것일 뿐 금과 달러 등 다른 자산의 가치가 상승하면 자금이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는 얘기다. 하나금융투자는 이날 내놓은 보고서에서 “비트코인과 금이 상당히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고 비트코인과 여타 암호화폐가 금융시장에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면서 “다만 비트코인은 여전히 전통 자산들에 비해 변동성이 높은 편이기에 부(富)를 저장하거나 교환의 매개체로 사용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현재 비트코인에 대한 투자는 금의 대체재로서가 아닌 언젠가 화폐 기능을 하게 될 것이라는 투기적 성격의 베팅이 주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호현 한국전자서명포럼 의장도 “비트코인 가격 변동은 비트코인의 기술적 내용과는 별개”라며 “비트코인은 아직 기술적으로 극복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지적했다.
/노윤주·도예리 기자 daisyroh@decent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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