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반발해 일본이 경제보복 카드를 꺼내들기 몇 주 전. 사석에서 만난 정부 부처의 한 관계자는 ‘일본과 이렇게까지 거리를 둬도 괜찮냐’는 기자의 질문에 “달리 할 게 없다”고 했습니다. 한일 갈등은 부처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는 “중국이 여전히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보복 등 힘의 논리를 펴는 가운데 일본과도 척을 지는 게 적절한지 고민해봐야 한다”면서도 “우려되는 부분이 적지 않지만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돼 있어 우리가 해결하기 쉽지 않다”고 토로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수출제한 조치를 4일 시행하면서 한일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실무 부처가 다양한 대응책을 내놓고 있지만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갈등을 야기한 근본 원인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뒤따릅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여러 대책을 내놨습니다. 그 중 하나인 ‘WTO 제소’의 실효성부터 따져보면 이렇습니다. 1심 격인 분쟁해결기구(DSB) 패널 판정에만 최소 6개월이 걸리는 데다 최종심 격인 상소기구는 올해 12월이면 사실상 기능이 마비됩니다. 현재 최종심 재판부는 구성에 필요한 최소인원인 3명으로 운영 중인데 올해 12월이면 2명의 임기가 만료되기 때문이죠. 상소위원을 추가로 선임하려면 모든 회원국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WTO 체제에 불만을 갖는 미국이 선임 절차를 보이콧하고 있습니다. 결국 1심에서 우리가 이겨도 상소기구의 최종 판정은 받지 못하고 일본의 보복성 수출규제가 계속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홍남기 부총리는 지난 4일 “일본이 경제 보복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다양한 대응 조치를, 또 상응할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며 무역 대응을 시사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이 우리에게 그랬듯, 일본이 우리에게 의존하는 품목을 골라 수출 규제에 나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대응이 업계의 피해를 되레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적잖습니다. 전자부품업계의 한 관계자는 “양국 간 대결이 국지전에서 전면전으로 확전되거나 장기화하는 게 기업이 생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라며 ‘강 대 강’ 대결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대응 무기로 사용할 품목을 찾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전자장비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일주일 전부터 주요 협회를 중심으로 일본이 우리에게 의존하는 품목을 조사해봤는데 이렇다 할만 한 게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자동차 조선 철강 등 기타 제조업 관계자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양국 간 교역 구조나 산업경쟁력을 봤을 때 일본에 피해를 줄 수 있는 결정적 한 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부 역시 속으로는 지금 당장 무역 대응을 고려할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 외에 정부는 ‘수입선 다변화’ ‘소재산업에 매년 1조 투자’ 등의 대책도 내놨습니다. 하지만 이들 대책은 당장의 피해를 만회할 수 있는 방안이라기보다 중장기 대책에 가깝다는 평이 지배적입니다. 이쯤 되니 ‘뾰족한 수가 없다’는 일부 관료들의 토로가 이해가 됩니다.
실무부처 사이에서는 일본과 대화를 재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간간이 새나왔습니다만 양국 정권의 자존심 대결 사이에 파묻히곤 했습니다. 실제 정부는 강제징용 배상 판결 논란과 관련해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원칙을 기반으로 ‘타협은 없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뒤늦게 ‘한일 기업 출연 기금안’ 등 대안을 내놓긴 했으나 앞서 여러 제안을 퇴짜맞은 일본의 마음을 돌리기엔 타이밍이 늦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외교적인 문제를 왜 경제적으로 풀려고 하느냐고 일본을 비판할 수는 있다”면서도 “주한 방위군 예산을 얘기하면서 자유무역협정(FTA)과 연계하는 미국의 경우만 봐도 외교·안보 이슈와 경제를 연계하는 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외교부에서 고위직을 지냈던 한 전직 관료는 “이미 한일 갈등은 관료들이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떠났다”며 “더 늦기 전에 ‘정치적 해결’이 필요한 때”라고 조언했습니다.
/세종=김우보기자 ub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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