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전봇대를 뽑겠다(이명박 정부).” “규제를 단두대에 올리겠다(박근혜 정부).”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하겠다(문재인 정부).”
정권마다 규제혁파에 요란한 구호들이 동원됐지만 우리나라의 규제 수준은 오히려 뒷걸음치고 있다. 캐나다 연구기관인 프레이저인스티튜트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기업규제자유도는 조사 대상 159개국 가운데 75위로 지난 2008년(69위) 때보다 오히려 후퇴했다. 금융(46위→50위), 노동(111위→142위), 기업(28위→31위) 분야 모두 순위가 하락했다. 정부 차원에서 규제 완화를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글로벌 기준으로는 결과가 턱없이 저조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정치권의 규제혁파 의지가 표(票) 논리에 무너진 결과”라고 지적했다.
경제5단체의 한 고위관계자는 18일 “규제개혁이 경제 효용을 높인다는 게 자명한데도 막대한 기득권을 틀어쥔 이익집단의 반발에 직면하면 아무것도 되는 게 없다”며 “특히 대기업이 조금이라도 수혜를 볼 것 같으면 규제개혁은 없던 일이 돼버리는 경향이 강하다”고 꼬집었다.
최근에는 모바일플랫폼을 활용한 콜버스 활성화가 가로막혔다. 출발지와 목적지·탑승인원 등을 입력해 경로가 같은 승객을 모아 운행하는 콜버스는 여객운수법을 둘러싼 택시조합의 반발로 활성화는 꿈도 못 꾸고 있다. 전세버스를 활용하는 획기적인 대중교통 수단으로 주목받았지만 택시 업계가 파업을 불사하는 등 강력히 반발하자 규제를 풀어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규제철폐 압박에 차종을 제한해 중소형 승합차 정도만 허용했지만 이도 저도 아닌 ‘생색내기식’ 규제 풀어주기에 그쳤다는 지적이다. 스타트업 업계의 한 관계자는 “새로운 사업을 벌이려 해도 일단 제한된 규제의 틀에서 아이디어를 내야 해 혁신적인 사업 모델을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고 토로했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인천 송도 경제자유구역 내 국내 종합병원 설립 허가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외자(外資) 유치를 통한 투자개방형 병원 용도로 확보한 경제자유구역 내 부지에 국내 종합병원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이를 ‘규제 완화’라고 홍보했다.
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규제 완화라기보다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에서 영향력이 센 시민단체의 반발에 꼬리를 내린 데 가깝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투자개방형 병원 설립에 ‘의료 민영화’라는 이념의 프레임을 덧씌운 것”이라며 “일부 시민단체의 반발에 투자개방형 병원을 사실상 포기했다”고 비판했다. 투자개방형 병원 규제를 풀면 일자리 26만개, 약 15조원의 부가가치 창출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분석 결과도 있지만 이런 경제적 논리는 일부 시민단체와 정치권의 반발로 힘을 잃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정부와 여야 정치권이 규제 완화라는 원칙론에는 동의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이해관계가 맞물린 이익집단과 시민단체의 반발에 직면하게 되고 원칙론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맹목적인 반(反)대기업 정서도 규제개혁을 가로막는 배경으로 꼽힌다. 정치권에서 규제 완화가 특정 기업의 편의 봐주기로 오해받을 것을 우려해 섣불리 나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전자업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꼭 필요한 규제 완화임에도 대기업이 관련돼 있으면 일단 멈칫하는 게 정치권”이라며 “이는 기업들이 신성장사업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지 못하는 걸림돌이 된다”고 토로했다. /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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