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원회 민간 자문기구인 금융행정혁신위원회가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은 물론 장기적으로 민간 금융회사에도 노동이사제 도입을 제안하는 권고안을 다음달 중 발표할 예정이어서 금융회사들의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 혁신위가 다음달 발표하는 권고안에는 은행권에 노동이사제 도입을 제안하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1차 권고안 발표 당시 최대한 최종 권고안을 수용하겠다고 밝힌 바 있고 노동이사제는 문재인 정부의 공약사항이라는 점에서 금융위가 권고안을 무시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노동이사제는 노조가 제3자를 사외이사로 추천해 이사회에 파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노조의 경영 개입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본지 11월23일자 1·3면 참조
하지만 노사 협의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도입이 시기상조라는 우려가 나온다. 당장 급해진 것은 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이다. 산은과 수은의 경우 특별법인 산은법과 수은법에 따라 각각 설립돼 국회 차원에서 ‘이사회에 노조 추천 이사를 포함시킨다’는 식으로 법을 개정하면 즉각 노조가 경영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국책은행 관계자들은 노동이사제가 도입되면 경영의 효율성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국책은행 관계자는 “지금도 노조위원장의 힘이 센데 사외이사를 추천할 수 있는 권한까지 생기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될 것”이라며 “노조 측 사외이사가 반대만 할 경우 만장일치를 선호하는 이사회 특성상 중요한 경영 결정이 계속 연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더구나 노동이사제는 서울시 산하 공기업만 일부 시행되고 있는 만큼 초기 혼란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다른 은행권 관계자는 “노동이사제를 반드시 도입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도록 하는 방법이 굳이 노동이사제뿐인지도 궁금하다”고 말했다.
국책은행 이사회의 경우 정서상 의결사항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데 노조 측 이사가 반대하면 이를 무릅쓰고 주요한 경영 결정을 강행할 최고경영자가 없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노조 측 이사는 노조 이익을 대변하다 보니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사사건건 반대 의견을 낼 수밖에 없는데 노이즈가 발생하는 것을 싫어하는 국책은행장들이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결정을 강행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국책은행 관계자는 “외부에서 낙하산 인사가 내려오면 잡음 나는 걸 제일 싫어하는데 노조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며 “노동이사제까지 도입하게 되면 의사결정이 한없이 늘어질 수 있다. 이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정부의 노동이사제 도입 추진이 오히려 공공기관 정책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현재 폐지된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대안으로 ‘직무급제’를 추진하고 있는데 노조 측 사외이사가 이 같은 움직임에 제동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산은 노조 등이 속해 있는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은 직무급제의 일괄적용을 반대하고 있다. 직무급제는 업무 성격, 난이도, 직무 책임성 등에 따라 급여에 차등을 두는 방식이다. 노동이사제 도입이 초읽기에 들어간 민간 금융회사들 역시 내년 초 주주총회를 앞두고 사안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특히 지난 20일 KB금융지주 주총에서 노조가 추천한 하승수 변호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에 대해 국민연금공단이 찬성표를 던진 것이 큰 충격이라는 반응이다.
대부분의 거대 금융회사 노조는 주주 제안을 통해 사외이사 선임 안건을 주총에 올릴 수 있다. 지난해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 의결권 지분이 0.1% 이상이면 주주 제안이 가능해져서다. 우리사주 지분은 우리은행이 5.35%, 신한금융이 4.73%, 하나금융이 0.89%, KB금융이 0.18%로 조건을 충족한다.
이 때문에 금융권에서는 정치권의 압박에 보여주기식으로라도 노동이사제를 도입해야 하지 않겠냐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융권에 노동이사제를 도입하려는 국회의원 중 다수는 과거 금융노조 출신”이라며 “이 같은 행위도 ‘관치’의 일종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김기혁·노희영기자 coldmeta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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