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의외의 발견, 예상치 못한 감동이다. 일제 강점기, 민족 수탈의 역사를 그린 뮤지컬 ‘아리랑’에서 이다지도 존재감 있는 여성 주역들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해서다.
연극 등 여타 무대 장르에 비해 제작비 부담이 큰 뮤지컬에선 특히 존재감 있는 여성 캐릭터를 만나기 쉽지 않다. 여성 관객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고 30대 여성들이 흥행 성적을 좌우하는 국내 뮤지컬 시장의 특성상 더욱 그렇다. 특히 역사물에서 그나마 눈에 띄는 여성 캐릭터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지닌 투사나 팜므파탈의 성적 매력을 지닌 여인 정도.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고도 끝내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단선적인 캐릭터에 그치거나 영웅서사에 함몰된 나머지 캐릭터 자체에 공감하기 어려워 아쉬움을 자아낸 작품들이 숱하다.
그러나 뮤지컬 ‘아리랑’은 다르다. 이 작품의 여성들은 힘없고 특별한 능력도 없는 보통의 여성들이다. 이들에게 닥쳐오는 고난은 지독하고 또, 가혹하다. 작품의 중심 서사를 이루는 감골댁 가족의 비극은 헐벗고 굶주린 데서 나아가 성노예로 유린당하고 강제 징용으로 목숨을 잃었던 민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지주라는 기득권을 버리고 의병대장이 되는 송수익과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친일파가 되는 양치성의 대립이 기존 역사물의 흔한 갈등구조라면 이 가운데 내쳐진 보통 여성들의 수난은 극의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요소다. 숱한 비극 속에 감골댁은 불에 타 잿더미가 되고, 그의 딸 수국은 노역장 간부에게 겁탈당하고 훗날 치성의 아이를 배기까지 한다. 송수익과 연정의 마음을 품었던, 이 마을의 아름다운 소리꾼 옥비는 오라비 득보를 살리기 위해 일본군 장교 고마다에게 몸을 바치고 오라비가 사랑하는 수국을 살리려 감옥에 끌려가기까지 한다.
이 같은 고난을 스스로 이겨내고 성장하는 여성캐릭터들은 이 작품이 비추고자 하는 민초들의 승리, 풀꽃의 강인함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극의 주요 모티브로 활용되는 김수영 시인의 ‘풀이 눕는다’ 속 구절처럼 이들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늦게 울어도 먼저 웃는 것은 이들이다. 부드러움에서 단단함으로, 안주에서 저항과 도전으로 삶과 내면의 좌표를 옮겨가는 이들의 성장은 객석에 또 다른 감동을 준다.
남녀 배우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주역은 감골댁 역의 김성녀였다. 김성녀는 풍부한 성량과 호소력 짙은 연기로 작품 전체에 힘을 불어넣는다. 감골댁이 모성의 강인함을 상징한 인물이었다면 그의 딸 수국은 일제 앞잡이 치성의 아이를 제 배로 낳고도 죽일 각오를 하며 악의 고리를 끊어내는 인간의 강인함을 대변한다. 뮤지컬 ‘아이다’에서도 핍박받는 백성들을 구하는 누비아의 공주 역을 맡았던 윤공주는 영웅이 아닌 민중의 강인함을 몸소 보여주는 수국 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존재감을 보여줬다. 이들을 통해 엄혹한 시절을 살아낸 보통 여인들의 승리가 무대 위에, 또 무대 중심에 오롯이 자리 잡았다.
12권 분량에 달하는 원작소설 조정래의 ‘아리랑’을 2시간 40분짜리 뮤지컬로 압축하면서도 스토리의 힘을 잃지 않았고 완급조절을 통해 극에 몰입시키는 연출력 역시 나무랄 데가 없었다. 특히 눈물을 짜내지 않는 담담함의 정서를 지키면서 적절하게 ‘한’과 ‘흥’을 배합해내는 능력은 초연 때부터 인정받은 이 작품의 매력이다. 초연보다 무대 공간이 2배 가까이 넓어졌지만 경사를 만들어 한 눈에 들어오게 만든 점, 무대 장치가 화려하지 않은 작품 특성에도 무대를 꽉 채운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 음악과 배우들의 연기 모두 좋은 점수를 줄 만했다.
아쉬운 점도 있다. 주로 1막에 집중됐던, 몇 가지 조악한 수준의 영상은 집중력을 해치는 수준을 넘어서 이 작품이 B급을 지향하는 작품인가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간접화법의 미학이 돋보였던 이 작품에서 유독 영상만큼은 직접 화법에 머물고 있던 탓도 크다. 9월3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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