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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군대 해산’의 아픈 진실

‘대한제국 군대 해산’의 아픈 진실

박승환 참령 순국 기록화. 군인으로서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자결한 박 참령의 순국은 대한제국군 병사들이 봉기하는 기폭제가 됐다.




‘1907년 8월 1일을 기해 서울의 시위대가 해산되고 이 날부터 지방의 진위대도 점차 해산 당하여 한국은 명실공히 군대 없는 꼭두각시 나라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산 속에서도 군인들은 최후의 항쟁을 계속하였다. 즉 8월 1일 시위대 제 1대대장 박승환의 자결로 폭발된 구한국군의 궐기는 이후 전국적인 의병운동으로 발전하여 한일합방이 단행될 때까지 면면히 계속되었던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1984년 발간한 한국사 19권 근대(대한제국의 종말과 의병항쟁) 편에 수록된 대한제국 군대 해산 기사의 전부다. 각급 학교의 국사 교과서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정말 그랬을까.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몇 줄로 간략하게 설명할 게 아니다. 단순한 친일의 차원을 넘어 우리의 일부 조상, 황제와 각료들은 비열하게 행동하고 제 한 몸의 안위를 위해 나라를 등졌다. 대부분의 장교는 군대의 무기를 감추고 봉기하려는 병사들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이런 와중에서도 대한제국 시위대의 약 절반은 극렬한 저항에 나섰다. 알려진 것보다 훨씬 처절하게 항거한 대한제국 시위 1연대 1대대와 시위 2연대 1대대 장병들의 분전이 역사의 횃불처럼 남아 있다.

먼저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우선 군사력. 대한제국은 무장과 훈련에서 일본군에 뒤졌을까. 훈련 수준에서는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부대의 명령권도 각급 부대 지휘관보다 한두 계급 아래인 일본인 교관들이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장비 측면에서는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을 절감한 고종은 좋다는 무기는 다 사들이려고 애썼다.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을 무너뜨렸던 미국제 개틀링 기관포는 물론 유럽의 몇몇 나라와 일본만 구비하던 맥심 기관총까지 갖췄다.

대한제국 군대 간부들이 소지했던 독일제 권총은 오늘날 한국군의 권총 보급 비율보다 높았다. 독일 크룹사가 제조한 최고급 대포는 일본군에도 없던 장비였다. 문제는 운영과 유지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소총만 해도 청국제와 일본제, 러시아제 소총이 뒤죽박죽이었다. 구한말 조선을 놓고 각축전을 벌인 세 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소총도 종류별로 갖췄다. 미국제와 영국제, 프랑스제와 독일제 소총이 혼재돼, 보급과 운용의 통일이 어려웠다. 훈련도 일본, 청나라와 러시아를 거쳐 다시 일본이 맡아 대한제국군은 편성에서 부대 훈련까지 혼란을 겪었다.

돈은 돈대로 들어갔다. 서인한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의 저서 ‘대한제국의 군사제도’에 따르면 대한제국 출범 직전인 1896년 군부(軍部) 예산이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6.28%.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피했던(아관파천)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한 대한제국 광무 원년(1897), 군부 예산의 비중은 23.38%로 뛰었다. 이후 1900년까지 26~28%를 차지했던 군사 예산 비중은 1901년 41.02%까지 치솟았다. 1904년까지 이 비중은 37~39%대를 유지했다. 물론 예산 자체가 어떤 해에는 전년보다 반감하는 등 들쭉날쭉했지만 군사비에 과도하게 투자됐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 결과가 다양한 나라에서 수입한 일류급 장비였다.

군인들의 대우는 일정하지 않았다. 예산 여건이 불안정했던 탓이다. 양상현 울산대 교수(역사문화학)의 연구 논문 ‘대한제국의 군제 개편과 군사 예산 운영’에 따르면 군부의 예산은 전체 예산의 37.63%인 519만 원이 책정됐으나 실제 집행액은 210만 원에 그쳤다. 1905년에는 예산 자체가 485만 원으로 줄어든 가운데 상반기 집행액은 70만 원에 불과했다. 장비 구입비는 외국과 약속이기에 어떻게든 지켰고, 돈이 모자라면 장병들에게 지급될 급여부터 미뤘다.

대한제국군 시위대의 평소 훈련 모습. 그러나 해산 당일 전투에서는 친일 장교들이 중화기와 탄약을 미리 빼돌려 탄약 부족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주목할만한 대목은 1905년을 기점으로 국방 예산이 확 줄었다는 점이다. 일제의 압박 때문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한 일제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군사비부터 잘랐다. 더욱이 1904년 한일 1차 협약으로 대한제국 중앙 부처의 고문으로 위촉된 일본인에 의한 ‘고문 정치’ 상황. 예산 편성권을 쥐락펴락한 탁지부(재무부) 고문 메가티 타테나로는 1906년 군부 예산을 137만 원으로 줄였다.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7%로 내려앉았다. 군대 해산 이듬해인 1908년 군부 예산은 31만 원으로 전체 예산의 1%로 떨어졌다. 예산이 줄면서 한때 2만 6,000여 명에 이르렀던 대한제국의 병력은 해산 직전에는 1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예산도 그렇지만 인사는 더욱 엉망이었다. 장영숙 상명대 교수의 연구논문 ‘고종의 군통수권 강화 시도와 무산 과정 연구’에 따르면 1899년부터 군대 해산까지 군부대신(국방부 장관)은 모두 34번 교체돼 평균 재임 기간 96.6일에 불과했다. 원수부에서 가장 핵심적인 군무국장은 석 달이 평균 임기였다. 군부 대신이 이틀 만에, 원수부 총장이 일주일 만에 교체되는 경우도 있었다. 민 씨 일가와 국왕의 측근 16명이 돌아가며 요직을 맡는 ‘회전문 인사’ 속에서도 자리가 불안하니 대신들은 외세에 줄을 댔다. 대한제국 정치세력의 자기 분열을 악용해 일본은 힘들이지 않고 친일파를 키워나갔다.

국내 문제가 꼬일 때마다 외국 군대를 불러들이거나 공사관에 피신하며 ‘외세 돌려막기’에 의존하던 고종에게 위기가 닥친 것은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하라고 강요당했다. 고종을 무력화하며 일제는 정미 7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을 사실상 식민지로 삼았다. 일제의 걸림돌은 군대. 약해졌다고 해도 수도인 한성에만 4,000여 명 이상의 중앙군이 일제에 반기를 들 경우 식민화는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정미 7조약의 비밀 각서에 ‘한국군 해산’ 조항을 넣은 것도 이런 인식에서다.

고종을 사실상 폐위(7월 19일)하는 일제의 강압에 한성의 백성들은 들고 일어났다. 군중이 연일 시위를 벌이며 고종의 복귀를 요구하는 가운데 시위 1연대 3대대 병사 100명이 백성들을 진압하는 일본과 한국 경찰에게 총격을 가해 일경이 사망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시위 2연대 3대대는 궁내부대신 박영효와 연통해 고종 황제를 보호하려는 작전도 짰다. 군대 해산 이전에 일본에게 군사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는 기회는 군부대신 이병무가 관련첩보를 일본군에게 고변하는 통에 무산되고 말았다.

대한제국 군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일제는 대한제국 장교들의 협력을 받아 주요 병기고와 탄약창부터 잠갔다. 일본 본토와 평양으로부터 증원군도 불렀다. 모든 준비가 끝난 7월 31일 10시 30분, 일제는 순종 황제를 움직여 조칙(詔勅)을 발표하게 만들었다. ‘짐이 생각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극히 절약해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이다. …(중략)…짐은 이제 황실을 호위하는 데 필요한 사람들을 뽑아두고 그 밖에는 일시 해산시킨다.’ 훗날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이 꾸민 가짜로 밝혀진 이 조칙에는 ‘반항하는 세력의 처단을 통감(이토 히로부미)에게 맡긴다’는 내용까지 포함돼 있었다.

이틀 날인 8월 1일 오전 7시, 군부대신 이병무는 시위혼성여단장 참장 양성환을 비롯해 연대장과 대대장 및 기병·포병·공병대장을 배속 일본군 군사교관과 함께 하세가와 조선주차일본군 사령관 관저로 소집, 군대 해산 조칙을 알렸다. 오전 10시까지 전 병력을 완전 비무장으로 동대문 부근 훈련원(현 국립 의료원·훈련원 공원 터) 연병장에 집결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약속된 시간인 오전 10시. 훈련원에 모인 인원은 소수에 불과했다. 기병대장 참령 김기선과 기병 88여 명이 정시에 도착했으나 나머지 부대는 일본군의 독촉과 장교들의 채근으로 겨우 모였다.



고 성대경 성균관대 교수(사학과)의 연구논문 ‘한말(韓末)의 군대 해산과 그 봉기’에 따르면 2시까지 도착한 병력은 1,812명. 1차 해산 대상으로 삼았던 3,441명 가운데 절반을 겨우 넘긴 채 3시까지 해산식이 진행됐다. 순종의 조칙을 낭독하고 부대별로 검과 견장을 반납했다. 노고에 보상한다며 하사는 80원, 1년 이상 근무한 병사는 50원, 1년 미만 병사는 25원씩 ‘은사금’을 받았다. 장병들은 진로에 대한 몇 가지 안내를 받고 자유 해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대한제국 군대는 이로써 역사에서 사라졌다.(궁궐을 수비하는 1개 대대만 일본군 예하 ‘조선보병대’라는 이름으로 존속했으나 세계대공황으로 경비를 줄인다며 1931년 해산됐다.

대한제국군 해산 직후 훈련원 모습. 일본군들이 막사 벽에 기대 비를 피하는 가운데 연병장 군데 군데에 대한제국군의 군모와 장비가 보인다.


바로 여기서 의문이 나온다.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들이 왜 해산식에 나타나지 않았는가. ‘왜 전체 병력이 모이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왜 52.7%의 장병들이 해산식에 참가했느냐’가 문제다. 의문이 꼬리를 문다. 여름비를 맞으며 해산식을 치렀던 장병들은 속이 편했을까. 해산식에 모이지 않은 장병 약 1,200여 명이 남대문과 서소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수백명 사상자를 낸 시가전을 펼쳤는지 정녕 몰랐다는 말인가. 교과서에 기술된 대로 시위 1연대 1대대장 참령 박승환은 자결을 택했다. 군대 해산 소식을 미리 알았는지 박 참령은 군부대신이 주관하는 아침 모임에 일부러 나가지 않고 중대장을 대신 보냈다.

돌아온 중대장으로부터 병사들에게는 비밀로 부친 채 훈련원에 집결시키라는 소식을 들은 그는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라며 목숨을 끊었다. 박 참령의 자결 수단은 권총이라는 설과 칼이라는 설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자결 시각. 8시에서 10시 20분까지 다양하다. 성강현 동의대학교 겸임교수의 연구논문 ‘군대 해산시 서소문 전투 연구’에 따르면 시위 1대대와 일본군과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시각은 오전 9시 30분. 대대장의 자결 소식에 분개한 시위 1연대 1대대 장병들이 무기를 꺼내 봉기하고 일본군에 알려진 시간을 고려하면 최소한 9시 경에는 박 참령이 순국한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왜 중요한가. 장석규 소령(1987년 당시 계급·육군 정훈공보실장 역임·현 수필가)의 ‘구 한국군의 애국정신-1907년 ’군대 해산‘ 시기를 중심으로’에 주목할 만한 대목이 나온다. ‘서로 이웃해 있던 제 1연대 1대대와 제 2연대 1대대는 아침 8시부터 11시까지 3시간 동안 기관총 3정을 앞세운 일제 침략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는데, 이로 인해 남대문에서 서대문에 이르는 길은 피바다가 될 정도였다’는 것이다. 서울 시내에서 2개 대대(각 대대 정원 591명) 병력이 거리가 피로 물드는 시가전을 펼치는 동안 대한제국의 나머지 장병들은 총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1,000여명에 달했다는 장교들은 무엇을 했는가. 어이하여 자기 나라 군대의 해산에 앞장 섰는가. 먼저 장교들의 사정을 보자. 일제의 속임수가 통했다. 일제는 ‘경비가 많이 드는 모병제 군대를 잠시 해산하고 징병제 군대로 재편한다’며 장교들은 해산 대상이 아니라고 속였다. 아무리 속였어도 대한제국군과 일본군 간 전투의 총소리가 요란한데도 해산식에 가라고 장병들을 재촉한 행위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장교들은 동료의 죽음에 눈 감은 덕을 봤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일제의 거짓말은 오래 못 갔다. 지방의 군대인 진위대(8개 진위대대)의 해산이 확인된 8월 말, 일제는 장교들에게도 해촉 사실을 알렸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서 시위대 병력의 절반 이상은 치욕의 해산식에 참가하고 1,200여 명은 용전을 펼쳤다면 나머지는 무엇을 했을까. 군대 해산 이전에 군문을 빠져나가 의병에 합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대문과 서소문 전투는 외신 기자들에게도 큰 감명을 줬다. 영국 신문기자 멕킨지는 ‘적어도 며칠 동안은 일본인들이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경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전투였다’고 남대문 전투를 소개했다. 병사들을 끝까지 지휘하며 영예롭게 전사한 장교도 있었다. 시위 2연대 1대대 남상덕 부위가 병사들을 지휘해 ‘러일 전쟁의 영웅’이라던 일본군 중대장 가지하라를 사살하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남대문 전투(서소문 전투)는 탄약 부족으로 시위대 장병들의 패배로 끝났으나 원주와 강화 진위대의 항전으로 이어졌다. 국가와 군대를 지키려고 목숨을 버렸던 대한제국 군대의 마지막은 정미 의병운동, 무장 독립투쟁의 초석을 깔았다. 물론 아쉬움도 크다. 역사에 가정이란 부질없는 짓이라지만 전체 병력이 유기적으로 운용됐다면, 박승환 참령이 자결할 게 아니라 병력을 지휘해 조직적으로 일본군과 싸웠다면 어땠을까라는 회한이 남는다.

군대를 강제 해산 당한 끝은 익히 아는 대로다. 대한제국은 망국의 늪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한제국은 군대 해산령에 맞서 항거에 나서 남대문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펼쳤으나 탄환 부족으로 일본군에게 패배, 다수가 포로로 붙잡혔다. 대한제국군은 비록 패배했으나 의병 활동과 독립군 투쟁으로 이어졌다.


110년 전 군대 해산을 보며 오늘의 우리를 생각한다. 대한제국 군대에서 결사 항전했던 주력은 하사관 이하 병졸들이었다. 당시의 지휘관들과 오늘날의 군 지휘관은 역량과 자질, 국가관에서 비교할 대상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나 일말의 의문을 지우기는 어렵다. 병사들의 ‘열정 페이’로 유지되는 군대, 아직도 병사를 ‘사병(私兵)’처럼 부려 문제를 야기한 사단장과 박 모 육군 대장은 우리의 민낯이다. 군 인사는 모두가 납득하는 수준인가. 고종과 대신들처럼 외세에 의존하려는 습성이 사라졌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자주국방’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의 인식은 110년 전과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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