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지만 꿈이 없는 학생이었죠.”
의과대에 갈 성적이 안 되자 부모님이 정해준 대로 지난 2003년 한양대 토목공학과에 입학했다. 동기들이 동아리를 기웃대고 술을 마실 때 도서관에 갔다. 기대가 따라오자 교수가 자연스러운 목표가 됐다. 수석으로 학부를 졸업했다. 취업이나 창업은 선택지에 없었다.
10년 뒤 럭스벨을 창업하고 브래지어 맞춤 제작 서비스 ‘사라스핏’을 운영하는 김민경(사진) 대표의 이야기다. 일률적으로 ‘크다’ ‘작다’로 분류되던 가슴에도 여러 개성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기성 속옷 브랜드에서 표준화된 사이즈를 정해놓고 소비자를 이에 맞췄다면 ‘단 하나의’ 브래지어를 만든다는 모토다.
김 대표는 최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년 365일 착용하는 브래지어지만 안 맞는 것을 입으면 갑옷같이 느껴진다”며 “장시간 일하거나 아이를 돌볼 때에도 편하게 입는 브래지어를 지향한다”고 말했다.
그는 2006년 삼성SDS에 입사해 개발자로 일하다 미국 미시간대에 진학해 MBA 과정을 밟았다. 남들처럼 ‘몸값’을 높이고 다른 분야로 갈아타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유학을 떠난 시점이 절묘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된 스타트업 붐이 바람을 탄 민들레 씨앗처럼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때 속옷 아이템을 떠올렸다. 1억3,000만명의 가슴 치수를 분석해 속옷 맞춤 제작을 시도한 ‘트루앤코’의 사례에서 성공 가능성을 봤다.
막상 2015년 창업을 하자 사정이 녹록지 않았다. 어떤 제조업체도 수량이 1만개가 되지 않는 소량 주문은 받으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전부 사이즈가 다른 맞춤 속옷 아닌가. 더 큰 난관은 속옷 디자인이었다. 디자이너들에게 발품을 팔며 연락을 했지만 성사되기 직전에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는 “나중에 일이 진행되다가도 상대편에서 거절하면 사업을 접어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고 말했다.
속옷 업계는 속옷 패턴과 디자인이 ‘핵심 기술’에 속한다. 대형 브랜드에서도 실장급에서만 속옷 디자인 전체를 할 수 있다. 진입 장벽이 높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직접 속옷 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했다. 샘플이 제대로 안 나오면 이유를 찾아내면서 ‘왜 어깨끈의 길이는 이 정도일까’ ‘양쪽 날개 살 주변 각도는 왜 이 각도로 했을까’ 등의 분석을 했다. 디자인을 설계도면으로 생각하는 ‘엔지니어 직업병’ 때문이었다.
이제 갓 첫발을 뗀 사라스핏은 오프라인 매장을 확장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살롱같이 대화하며 엄마같이 다가간다’는 콘셉트를 지향한다. 김 대표는 “저랑 만나 가슴 치수를 재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고객들이 스스로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느껴진다”며 “더 많은 이가 여성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사랑하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혜진기자·조은지인턴기자 madein@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