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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봉균 前장관 별세] "정치로 인한 불확실성만 제거된다면…" 눈 감을때까지 경제 걱정한 '꾀주머니'

현안 복잡해도 핵심만 간파

경제개발계획 5차례나 주도

YS땐 IT 산업화 기틀 닦고

외환위기 닥치자 빅딜 지휘

꼿꼿한 성품에 소신도 뚜렷

"한국 잠재력 다시 발휘할것"

국정농단 혼돈 속 희망 남겨

1일 서울 강남구 일원로 서울삼성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31일 향년 74세로 고인이 된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병색이 짙던 지난해 12월에도 서울경제신문과 신년 인터뷰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힐 만큼 의욕을 갖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해 11월30일 역대 정부의 경제성장 회고록인 ‘코리안 미러클 4’ 발간회 행사장. 당시 그의 모습은 이미 병색이 완연했다. 이처럼 위중한 상황에서도 강 전 장관은 국정농단에 휘둘린 국가 경제의 앞날을 걱정하며 본지의 인터뷰 제의에 흔쾌히 응했었다.

강 전 장관의 젊은 시절 별명은 ‘꾀주머니’다. 복잡한 현안의 핵심을 간파해 정책 아이디어를 내놓아 어디에서나 인정받았다. 그가 경제기획원 종합정책과장을 할 때 일화다. 그는 매일 오전9시까지 장관에게 국내외 모든 이슈를 한 장의 보고서로 정리해 올려야 했다. 그는 머릿속으로 정리해 사무관에게 입으로 불러줬고 그대로 받아 적으면 군더더기 없는 보고서가 됐다고 한다. 능력을 인정받은 강 전 장관은 박정희 정부가 시작한 일곱 차례의 경제개발계획 중 다섯 번을 주도하면서 젊은 관료지만 나라 전체의 정책을 구상할 만큼 성장했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내며 우리나라 정보기술(IT) 산업화 초기 기틀을 닦았다.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대학에 가지 못하고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군산사범대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 22세에 서울대 경영대학에 들어갔고 행정고시 6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스스로가 가난했고 나라도 가난했기에 잘 살기 위해서는 경제를 배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경영대학을 택했다고 한다.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극복의 선봉장에 섰다. 강 전 장관이 지난 1999년 6월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대기업 회장단과의 오찬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처럼 힘들게 들어간 공직사회에서 그는 후배 공직자들로부터 ‘독종’으로 불렸고 깐깐하고 무서운 선배였다. 그가 국장일 때 경제부처 사무관을 지낸 모 장관은 “워낙 치밀한데다 내용에 논리가 틀리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냈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후배도 많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그렇게 신경 써서 가르치는 관료는 없었다”고 술회했다. 그의 경제관료로서의 탁월한 역량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빛을 발했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1998년 당선인 시절 그를 불러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해결사를 맡겼고 그는 1년 6개월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내면서 대기업 빅딜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그로서는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지만 지금 일각에서는 그가 무차별하게 기업을 찢어 붙이면서 살 수 있는 기업을 잃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코리안 미러클 4’ 발간회 행사장에서 “20년 전 IMF를 극복하며 경제구조를 개혁하고 기본 토대를 튼튼히 구축했다고 자부했지만 사실 성장 잠재력은 날로 약화했다”면서도 “그러나 그만큼이라도 경제구조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큰 충격 없이 견딜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분당 갑에 여당인 새천년민주당 당적으로 뛰어들었으나 뜻밖에 낙선했다. 그는 여당에 불리한 지역구를 스스로 선택했다고 회고했으나 관료사회에서는 유명인이지만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데다 꼿꼿한 성품 때문에 유권자에게 고개 숙이며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정치인으로는 낙제점이었다는 후문도 있다. 말년의 강 전 장관을 설명하는 단어는 ‘소신’이다. 그가 재경부 장관으로 재직할 때 금융정책국장으로 발탁했던 이종구 바른정당 정책위의장은 “나를 국장으로 뽑은 강 전 장관이 가장 먼저 물어본 것은 소신과 철학이 있느냐는 것이었다”면서 공직자보다는 직장인으로 전락해 버린 요즈음의 관료와 달랐다고 기억했다.



그는 국회의원 3선을 지낸 민주당을 떠나 지난해 총선에서 여당인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깜짝 등장하며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는 정계 은퇴 후 정치권의 포퓰리즘을 걱정해 건전재정포럼을 만들어 이끌면서 친정인 야당에도 쓴소리를 던졌고 김무성 새누리당 당시 대표가 민주당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에 대적하려고 그를 영입한 것이다. 강 전 장관은 조선·해운 구조조정의 해법으로 한국은행이 산업은행 발행 채권을 인수하는 한국판 양적완화를 공약으로 주장하며 관심을 끌었지만 선거는 참패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희망’이었다. “저는 전화위복 기회 가능성을 높이 칩니다.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경제 걱정을 많이 하는데 정치적 혼돈에서 오는 불확실성만 제거되면 경제활동은 큰 차질 없이 살아날 수 있어요. 더 깊게 보면 우리나라 경제가 더 정치 중립적으로 굴러가는 체제로 가면 우리 경제는 예전처럼 잠재력 다시 발휘할 수 있을 겁니다(코리아 미라클 행사장에서).”

/세종=임세원기자 wh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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