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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_창업을_응원해] <4> 퇴직금 400만원으로 시작해 매출 30억 기업 키운 사연

최영 펀비즈 대표

친환경 천기저귀를 무기로 '중국의 아가방' 꿈꾸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대비해 내년엔 실버 시장 진출

최영 펀비즈 대표




10여년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중국 진출 업무를 도맡아 하면서 대륙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신했다. 퇴직금 400만원으로 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친환경 천기저귀 시장에 뛰어들었다. 정보기술(IT) 산업에서 일하던 사람이 무슨 천기저귀냐는 반대의 목소리도 높았지만, 직접 미싱을 배워 제조 전반을 장악할 정도로 독하게 버텨냈고 결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현재 기저귀를 비롯해 유아 속옷, 배냇저고리, 실버용품 등으로 품목을 늘리며 사세를 확장하고 있는 펀비즈,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맞춰 출산용품과 실버용품을 아우르는 ‘아시아 1등’ 기업으로 도약하는 게 최종 목표다.

억척스러운 모친의 삶, 과감한 도전정신 일깨우다

천기저귀 시장 국내 1위로 잘 알려진 출산유아용품 브랜드 ‘베이비앙(Babyan)’의 최영(39·사진) 펀비즈 대표는 부산 출신이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네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아들 못지 않은 딸 노릇을 하며 성장했다. 3대 독자인 부친 입장에선 아들이 없어 아쉬웠을 법도 했지만,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은 남달랐다. 특히 마흔이 넘어 얻은 막내딸에 대한 사랑은 유별났다.

“저보다 11살 위의 첫째 언니가 샤프펜슬을 고장내면 손모가지가 잘못 되어서 그렇다며 타박하셨다는데, 제가 고장을 내면 제조업체가 잘 못 만들어서 그렇다며 제 실수를 감싸셨어요. 교사인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시부모 병 수발에 3대 독자 며느리 역할까지 하면서 고생이 심하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음식 솜씨가 유별나게 좋아서 동네 잔치를 하면 저희 엄마를 꼭 불러야 한다고 얘기가 나올 정도였지요.”

조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딸 넷을 이끌고 서울 신림동으로 이사를 왔다. 부산의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아버지와는 떨어져 있어야 했지만, 자식들의 교육과 미래를 위한 결정이라며 실행에 옮겼다. 동네에 작은 식당을 차린 어머니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했고, 덕분에 자식 농사도 성공했다. 최 대표는 어머니의 억척스러운 생활력이 고맙기도 했지만 한창 예민한 사춘기에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게 무척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말이면 동두천의 이모 댁으로 놀러 갔고, 방학 때면 아예 동두천에 눌러 살았다.

“이종사촌 동생이 동갑으로 워낙 친했던 데다 식당 일이 바빠 대화할 시간이 없던 어머니와 달리 전업주부였던 이모는 먹고 싶은 것 다 해주셨고, 속 깊은 얘기도 많이 나눴어요. 그래서 제게는 ‘또 한 명의 엄마’나 다름없었지요. 어쩌면 엄마한테 받고 싶었던 정을 이모한테 받으며 정서적인 안정을 얻었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여자 혼자 가게를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지금 돌이켜보면 과감하게 도전하는 엄마의 사업가적 기질과 한번 약속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이모의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함께 물려 받았나 봐요.”

대륙의 가능성 확신한 중국 유학 시절



이모 댁에서 살다시피 했던 그는 고등학교 때 동두천으로 전학을 갔다. 이모부가 중국 선양(瀋陽)을 오가며 무역업을 했던 터라 중국으로 대학 진학을 할 생각을 갖고 있던 것. 특별한 장래 희망이 없던 그는 안정적인 직업으로 의사를 택했고, 선양유학원의 임상병리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본인의 적성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용어를 무조건 외워야 하는 것, 그것도 중국어로 습득해야 한다는 점이 큰 부담이 됐다. 더구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약점이 있어 환자들을 친절하게 대할 자신도 없었다고 고백한다. 임상병리학과를 다니면서 경영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했던 것도 자신에게 의사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작용했던 것일까.

그는 중국에서 보낸 5년이 자신의 인생을 바꾼 터닝포인트라고 말한다. 또래 친구들을 자연스럽게 사귀면서 중국인이 성향을 이해하게 됐고, 대륙의 무한한 가능성도 확신할 수 있었다. 더 중요한 포인트는 현지의 끈끈한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것. 당시 같이 밥 먹고, 술 마시면서 어울렸던 친구들이 지금은 경찰서장이 돼 있거나, 변리사를 한다거나, 정치협회장(우리나라의 도의회 의장)으로 성장하면서 외국인이 쉽게 얻을 수 없는 탄탄한 ‘꽌시(關係)’를 자연스럽게 확보했다는 점이다.

“지금 사업을 하면서 그들을 만나면 공식적으로 루트를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융숭하게 접대를 해야 하고 그마저도 결과물이 확실하지 않지만, 어린 나이에 만나 지금까지 관계를 이어온 만큼 서로 믿고, 밀어주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거죠. 중국에서는 이런 꽌시가 그 사람의 중요한 능력이자 자산으로 보거든요. 내 주변에 친구가 얼마나 많은가가 그 사람이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될 정도니까요. 실제로 친구라는 의미도 단순히 사귄다는 개념을 넘어서서 내 분수에 넘칠 정도로 대접하고 챙겨주고, 또 나중에 나도 그만큼 돌려받는 관계로 인식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인적 자산인 셈이죠. 오늘 내가 친구한테 제공하는 모든 편의나 호의가 나중에 나에게 닥칠지 모를 어려움에 대비해서 저축하는 행위, 바로 키핑(keeping)하는 개념인 거죠. 이런 중국인 특유의 성향을 모르고서는 중국 사업에서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해외 사업부에서 재능을 살리다



1998년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여파로 막막해진 취업 전선이었다. 처음에는 들어갈 만한 일자리 자체가 없어서 지인 소개로 다단계회사에 들어갔다가 빠져 나오는 등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로 인연을 맺었던 분이 친구의 회사를 소개해주면서 그의 첫 직장생활이 시작됐다. 중국이나 홍콩으로 ‘산요(SANYO)’의 전자부품을 수출하던 회사로, 중국어를 잘 하는 여직원을 필요로 했던 것. 나중에 들어보니 그녀의 당찬 모습이 대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제가 빨간 미니스커트를 입고 면접을 갔는데, 그 모습이 어떻게 보면 매우 건방져 보일 수도 있었지만 이런 친구라면 ‘모 아니면 도’일 테니 한번 뽑아보자고 생각했다고 하네요. 회사를 떠난 후에도 대표님과는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 지금도 가끔씩 빨간 미니스커트 얘기를 꺼내시지요.”(웃음)

최 대표는 탁월한 중국어 실력과 경영학도(부전공)이라는 자신의 장점을 살려 해외사업부에서 열정을 불태웠다. 사회초년병이지만 다양한 업무를 도맡아 하면서 직무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시장의 변화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저렴한 모방제품이 잇따라 나오면서 회사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결국 2001년 부도를 맞았다. 4개월 넘게 월급이 안 나왔지만 회사가 완전히 정리될 때까지 함께 했다. 첫 직장이라는 애착도 있었지만, 3년 넘는 세월에 대한 의리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중국 최초 컬러링 수출 계약을 체결했던 옴니텔 근무 당시의 모습. /사진제공=최영 대표


회사가 문을 닫자 대표는 그녀를 동생이 운영하는 정보기술(IT) 기업 옴니텔에 소개했다. 이동통신 환경에 방송 개념을 적용해 모바일 방송 및 무선 인터넷 콘텐츠 사업을 펼쳤던 옴니텔은 나래이동통신 기술연구소 선임연구원 출신의 김경선 대표가 1998년 설립했다. 그녀가 합류했을 때 옴니텔은 중국 시장 진출을 준비 중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녀는 중국사업팀장을 맡게 됐다. “중국은 당시 부가서비스 개념은 없이 통화료에 매출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수익 구조였어요. 반면에 한국의 통신사는 부가서비스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글로벌 시장에서도 선도적 위치에 있었죠. 특히 기본통화료보다 부가가치가 높았던 만큼 시장성이 높아 당시 차이나모바일이나 유니콤 등이 우리의 통신서비스를 벤처마킹했답니다.”

하지만 한국의 부가서비스와 중국의 그것은 차이가 컸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중가요 등 음악을 컬러링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주류였다면, 중국의 경우 성우가 1인 다역의 만담 형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서비스에 대한 선호도가 훨씬 높았다. 중국사업팀장을 맡았던 6년간 그는 한 달에 20일은 중국에서 살다시피 했을 정도로 중국 시장 개척에 열정을 쏟았고 결국 중국 26개성에 지사를 설립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일궈냈다.

‘블루오션’ 천기저귀 시장에 뛰어들다



1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 사업’에 대한 열망을 키웠던 최 대표는 2006년 6월 퇴직금 400만원을 갖고 창업에 나섰다. 당시 남편의 사업이 위기를 맞으면서 경제적인 해결책이 절실했던 데다 중국 시장을 오가면서 체득했던 사업의 감(感)을 내 것으로 승화시키자는 욕구도 작용했다. 가산동에서 사업하던 지인이 갑작스럽게 부도를 맞아 비워둔 사무실과 사무집기를 당분간 빌려 쓰기로 했고 지인에게는 사무실 월세 대신 생활비를 보태주기로 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뛰어들지는 않았다. 그는 우선 중국과 일본, 미국, 홍콩 등 세계 곳곳에 포진한 친구들에게 사업 아이템을 추천 받았다. 각 시장별로 뜨고 있는 아이템과 지속 성장이 가능한 시장이라는 전제 조건이 붙었다.

어느 날 구글 검색을 하면서 시장 조사를 하던 최 대표의 눈에 유럽에서 판매되는 팬티형 천기저귀가 들어왔다. 직접 구입했지만 크기가 너무 커서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게 큰 단점이었다.

“그래! 1회용 팬티기저귀를 사용하는 영아들이 입을 수 있는 크기로 친환경 천기저귀를 만들면 승산이 있을 거야!”

베이비앙 제품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최 대표의 딸 규림 양의 모습. /사진제공=최영 대표




중국 사업을 하면서 영유아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눈 여겨 봤던 만큼 프리미엄 제품으로 영유아 시장을 공략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종국에는 ‘중국의 아가방’이 되겠다는 게 그의 창업 비전이었다.

퇴직금 400만원이 전 재산이었던 그는 원단을 구매할 돈도, 공장을 돌린 돈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자산 중 하나인 ‘꽌시’를 활용했다. 중국에서 커튼 공장을 하는 친구에게 자신이 보내주는 디자인대로 천기저귀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당장 돈을 줄 수 없으니 나중에 제품이 팔리면 원단값과 공임비를 주겠다고 했다. 그 친구는 두말 않고 수락했고, 이렇게 해서 베이비앙의 첫 기저귀가 탄생하게 됐다.

“친환경성도 중요하지만 엄마들이 디자인적인 요소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거든요. 13가지 컬러로 팬티형 천기저귀를 만들어 신세대 엄마들이 ‘내 아이에게 꼭 입히고 싶은 기저귀’로 각인되고 싶었죠.”

물론 사업 초창기에는 브랜드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데다 1회용 종이 기저귀에 익숙했던 엄마들에게 천기저귀로 어필하기가 쉽지 않았다. 첫 6개월 동안은 총 매출이 1,000만원도 되지 않아 폐업을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회가 왔다. 2007년 2월 서울베이비엑스포에 출품했는데, 반응이 너무 폭발적이었던 것. 엑스포 이후 매출은 급격하게 늘었지만 경쟁사 측이 천기저귀가 중국산이라 아기들한테 좋지 않다고 비방하면서 다시 위기를 맞이했다고 한다.

재봉틀을 돌리며 사업을 장악하다



오랜 고심 끝에 최 대표는 친환경성을 담보한 ‘메이드 인 코리아’로 방향을 틀었다. 특히 그 동안 1회용 기저귀 시장에서 문제로 지적됐던 형광 물질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제품 생산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사무실 옆에 재봉틀 두 대를 들여놓고 아주머니 두 명을 고용했지만, 애초 기대만큼 생산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았다. 중국 공장을 이용할 때보다 생산량은 급격하게 떨어졌고, 재봉질 상태까지 불량해서 고객 불만까지 접수됐다. 미싱 담당 아주머니에게 문제를 지적하면 ‘사장이 잘 몰라서 그런다’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최 대표는 의정부에 자리한 지인의 공장으로 출근했다. 낮에는 공장에서 미싱을 배웠고, 저녁에는 회사로 돌아와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더니 제조 과정을 장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문제를 빚었던 직원 두 명은 내보내고, 새로 사람을 구했다. 저녁 9시까지 제품을 만들어 놓으면 최 대표가 새벽까지 다림질과 포장 등 마무리 공정을 직접 했다.

최영 대표가 직접 재봉틀을 돌리며 제품 마무리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최영 대표


“대표가 잘 모르면 직원들이 무시하고 딴 생각을 하기 십상이죠. 내가 정확하게 알고, 해당 업무를 장악해야 지시도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저녁에 회사로 돌아와서도 재봉틀 앞에 앉아 밤 늦게까지 연습할 정도로 고군분투했지만, 어제의 땀이 오늘의 결실을 맺는 밑바탕이 됐다고 생각해요.”

이런 노력 덕분인지 신세대 엄마들 사이에서 베이비앙은 ‘무형광 국민 천기저귀’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재고가 없어 고객에게 배송 날짜 지연에 대해 양해를 구할 정도로 뜨거운 인기를 끌었다. 물론 무형광 소재로 만든 천기저귀이기 때문에 타사 제품보다 1.5~3배 가량 비싸지만, 정직함과 성실함이 결실을 맺어 올해 총 매출 30억원을 달성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가격 경쟁력에 대한 우려에 그는 “개당 2만원대로, 24개월 아기 기준 1회용 기저귀 소요 비용이 통상 300만원에 달하는데, 천기저귀는 25장으로 50만원 정도만 소요된다”며 “세탁을 위한 수도세나 전기세도 들긴 하겠지만 아이의 피부와 환경을 생각하면 천기저귀만큼 내 아이에게 큰 선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얼룩 세탁의 어려움에 대해선 세탁을 하면 얼룩이 거의 남지 않을 정도로 기저귀에 특화해서 원단을 개발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패셔너블한(Fashionable) 출산용품 브랜드를 지향하는 ‘베이비앙’은 대표적인 히트 아이템 천기저귀 외에도 배변훈련팬티, 속싸개, 수면조끼, 영유아내의, 침구나 타올 등 다양한 출산유아용품으로 제품군을 확장하고 있다. 특히 24개월 이하 영유아를 타깃 시장으로 삼은 데는 최 대표의 치밀한 시장 분석이 반영됐다는 설명이다.

“처음에는 7~ 8세까지 넓힐 생각이었는데, 시장별 어린이 발육 치수를 조사해 보니 전세계적으로 만 24개월까지의 베이비 시장이 국적이나 인종과 상관 없이 사이즈의 격차가 거의 없더군요. 토들러나 키즈 시장은 서양과 동양이 사이즈 차이가 크고, 아시아로만 따져도 한국·중국·일본의 사이즈가 차이가 나거든요. 만 24개월로 잡아야 글로벌 시장 진입에 장애가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를 겨냥하다



최 대표는 베이비앙의 성공을 바탕으로 실버 세대를 겨냥한 브랜드도 론칭할 계획이다. 브랜드명은 에코리아(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로, 코리아(대한민국)에 에코가 있다는 의미까지 담았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맞춰 베이비앙과 함께 에코리아를 두 축으로 가져갈 방침입니다. 에코리아에는 실버 세대가 주로 사용하는 실버 전용 기저귀와 침구류 등 다양한 제품군을 개발 중이구요.”

펀비즈는 궁극적으로 아시아 시장 ‘넘버1’이 되는 게 목표다. 전세계 인구 74억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45억명이 아시아인인 만큼 미래 성장 가치는 아시아에 있다는 게 최 대표의 판단이다.

“아시아에 터를 잡고 앉아서 아시아 넘버1도 되지 못한 상황에서 유럽이나 미국 시장까지 가서 경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내 안방을 내주고 나가는 건 미련한 거죠. 내 안방부터 지킨 후에 도전해도 늦지 않다고 봅니다.”

현재 중국을 포함해 대만, 싱가폴, 홍콩, 일본 등에 진출해 있으며 내년부터는 베트남이나 몽골, 라오스 등으로 영역을 확대할 계획이다. 올해 해외 시장 매출 비중은 10%, 내년에는 20%로 끌어 올리고 총 매출 50억원을 달성한다는 목표도 세워 놓았다. 특히 내년에는 실버 시장까지 본격 진출하면서 명실공히 출산용품과 실버용품을 아우르는 ‘저출산 고령화 전문기업’으로 발돋움한다는 포부다.

최 대표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세 가지 모토를 항상 가슴 속 깊이 명심하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 설사 망하더라도 절대 빚은 지지 말자(지금까지 외부 펀딩은 단 1원도 받지 않았다) 둘째, 최영이라는 이름의 ‘영’답게 절대로 마이너스를 만들지 말자(이익을 못 내도 적자는 내지 말자는 거다) 셋째, 직원들에게 봉급을 주지 못하는 날이 오면 미련 없이 회사 문을 닫는다(지금까지 한 번도 월급날을 어겨본 적 없다)

창업하고 싶어하는 후배들에게는 차선책으로 창업을 선택하지는 말라고 조언했다.

“단순히 취업이 안 되서, 혹은 할 일이 없어서, 아니면 지금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차선책으로 창업을 선택하진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 자세로 창업해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어요. 자기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세요. ‘나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벌어서 누군가의 봉급을 줄 수 있는 능력이 되는가’라고 말이죠. 스스로 돈을 벌어보고, 그 무게감을 제대로 깨닫고 창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최 대표는 최근 베이징에 자리한 ‘중국판 실리콘밸리’ 중관춘에서 만난 청년들과의 만남을 소개했다. “대부분이 중국에서도 내로라 하는 명문대 출신이예요. 그렇게 좋은 대학 나와서 왜 창업을 하냐, 대기업이나 정부기관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이런 답이 돌아오더군요. ‘내 인생을 내 힘으로 개척하면서 나에게 닥칠 리스크 역시 나의 힘으로 감당하는 게 더 좋다. 대기업에 들어가 (나의 리스크를) 남의 힘에 맡기는 게 아니라 내가 창업을 해서 리스크를 감당하는 게 더 의미 있는 일이다’라고 말이죠. 내 운명을 내 힘으로 개척하겠다는 청년들의 투지가 무척 부럽고 보기 좋았던 기억입니다. 우리나라도 최근 창업에 뛰어드는 청년들이 크게 늘었어요. 내 힘으로 변화를 일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뛰어들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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