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의 전형적인 개미투자자 ‘나대박’씨는 주로 주식으로 수십% 수익을 내는 데 골몰했다. 아직 초저금리 시대에 접어들기 전인데다 금융투자시장에서 고를 수 있는 상품의 종류도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기준금리가 1%대까지 떨어지고 시장 불확실성이 증대되면서 나씨 같은 투자자들의 인식도 바뀌었다. 리스크보다는 안정성을, ‘몰빵투자’보다는 자산배분과 포트폴리오 관리에 보다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인식의 변화를 나타내는 표지 중 하나가 랩어카운트 시장의 성장이다.
16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랩어카운트 시장 규모는 지난 9월 말을 기준으로 100조3,146억원을 기록했다. 랩어카운트가 국내 시장에 출시된 지 15년 만에 100조원을 넘어선 것이다. 금융당국은 2001년 자문형 랩어카운트, 2003년 일임형 랩어카운트 출시를 승인한 바 있다.
랩어카운트는 특히 최근 2년 사이에만 30조원 가까이 시장 규모가 확대됐다. 정희수 미래에셋 글로벌자산배분팀 과장은 “자산배분에 대한 인식이 강화됐기 때문”이라며 “특히 최근에는 투자자 개개인들의 성향, 투자 목표 등에 다양하게 맞출 수 있는 지점운용랩을 중심으로 시장이 성장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전성호 삼성투자증권 랩운용팀 차장은 “보다 투명한 상품, 다양한 자산에 대한 투자자들의 요구가 반영되면서 시장 확대로 이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랩어카운트는 보다 장기적으로 수익률에 집중할 수 있는 상품 구조이기도 하다. 박득현 NH투자증권(005940) 랩운용부 부장은 “랩어카운트는 전문성을 강화했으면서도 추가적인 매매수수료 없이 장기 수익률에 초점을 맞춘 상품이라 투자자·증권사 입장에서 모두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일반 증권계좌로 주식이나 펀드를 매매할 때는 매매할 때마다 수수료가 붙는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정작 수익률은 못 올리면서 매매 횟수만 늘려 수수료 수입만 챙기는 증권사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반면 랩어카운트는 매매 횟수에 상관없이 연간 정해진 보수와 수익에 대한 성과보수만 뗀다.
업계에서는 선진국처럼 국내 랩어카운트 시장도 꾸준히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서민형’ 랩어카운트라고 할 수 있는 일임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출시도 시장 확대를 이끌 것으로 기대된다. 일임형 ISA는 정해진 모델포트폴리오(MP)에 맞춰야 하는 대신 수수료가 저렴하고 수익 중 200만원까지 세금이 면제된다. 금융당국은 ISA 도입에 이어 신탁제도 활성화 방안을 마련 중이다.
안철영 하나금융투자 전략랩운용실 차장은 “랩 상품도 ISA처럼 수익과 손해를 합산해 최종 수익에 대해서만 세금을 부과하는 식으로 개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유주희기자 ginger@sedaily.com
◇랩어카운트란
:주식, 펀드, 채권, 상장지수펀드(ETF), 주가연계증권(ELS) 등 다양한 자산을 한 데 담아 운용하는 종합 자산관리 상품. 자문형 랩은 투자자문사와 증권사가 투자 조언만 제공하고 일임형 랩은 증권사가 실제 운용까지 도맡는다. 일임형 랩은 다시 증권사 본사가 운용하는 본사 운용랩, 영업점에서 운용하는 지점운용랩으로 나뉜다. 일임형 ISA 역시 일임형 랩의 한 종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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