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를 대상으로 물건을 공급하는 중소·벤처기업들이 김영란법 시행으로 공무원들과의 접점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통상적으로 경쟁입찰 또는 수의계약을 통해 정부에 물건을 공급할 수 있지만 사실상 수의계약을 통한 공급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수도권 A중소기업의 한 관계자는 “특정 제품에 대한 특허를 보유한 중소기업의 경우 경쟁입찰을 통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수의계약 형태로 정부에 공급할 수 있다”면서 “아주 적은 금액이라도 정부에 제품을 공급하게 되면 일반 민간시장에서도 제품 품질을 인정받아 활로가 생기지만 현재는 공무원들과 만나 제품을 홍보할 수 있는 길이 막혔다”고 전했다. 김영란법 시행 이전에는 공무원들과 점심·저녁 식사를 함께하면서 제품을 직접 가지고 가 홍보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공무원들이 자칫 오해를 살 수 있다는 판단에 중소기업과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 중소기업은 주거래은행과의 만남이 끊겨 자칫 자금조달 악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금융공기업이 아니지만 정부기금 수탁업무를 맡은 시중은행 직원들도 김영란법 적용을 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기업 대표가 쉽사리 은행을 방문하지 못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부산 지역 C기업의 대표는 “D은행에 30년 넘게 예금을 맡기고 외화대출을 받는 등 거래가 많아 친했는데 이제는 은행원들과 밥도 같이 못 먹게 됐다”고 한탄했다.
개성공단 기업을 포함해 당장 대출이 필요한 중소기업들도 은행에 섣불리 발걸음을 옮기지 못해 속만 앓고 있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대출심사를 받을 때 회사의 재무상태가 나아졌다고 설명하기도 꺼려진다”며 “이자율이 낮아지거나 대출금액이 늘어나는 것이 혹시 김영란법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앞선다”고 말했다.
신입 공채를 미뤄 인력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도 나오고 있다. NS홈쇼핑은 당초 오는 11월 입사 예정으로 하반기 신입사원 공채를 진행하려 했으나 내부 논의를 거쳐 내년 1월로 늦춰 공채 일정을 진행하기로 했다. 내년 2월 졸업예정인 지원자들이 조기취업 이후 학교에 취업계를 제출해도 부정청탁으로 간주돼 학점 인정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어서다. 일부 중소기업도 10월 중 진행하려던 신입 공채를 내년 초로 미루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한 중소기업 인사 채용 담당자는 “매년 가을에 소규모로 신입 공채를 빠짐없이 진행했는데 올해는 미뤄야 할 것 같다”며 “가을에 신입 직원들을 뽑아야 교육을 시킨 뒤 내년 초부터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해 걱정”이라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김영란법 시행으로 중소기업과 공무원의 접점이 줄어들면서 정부가 신속히 중기 지원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소기업 지원업무를 수행하는 부처 관계자는 “예전에는 현장을 직접 방문해 기업을 상담하는 일이 많았는데 지금은 조심스럽게 전화로 파악하는 정도”라며 “전화로만 얘기를 들으면 중소기업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어 맞춤형 지원이 잘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김상용·한동훈·백주연기자 kim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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