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공권력의 권위가 참으로 부럽더라." K교수의 경제부처 장관 시절 경험담. 프랑스 파리 외곽의 호텔에서 열린 조찬강연회의 질의응답이 길어지면서 장관은 연신 시계를 쳐다봤다. 한·프랑스 경제장관 회담에 늦을 것 같아 조바심을 보이자 주최 측의 대답이 돌아왔다. "걱정마세요."
강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차에 오른 장관 일행은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다. 선두에 선 경찰 오토바이는 길을 제대로 비켜주지 않는 차를 장화발로 걷어차며 길을 텄다. 프랑스 측의 장담대로 우리 장관 일행은 출근시간대의 혼잡에도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유·평등·박애, 그리고 관용의 나라인 프랑스의 경찰이 보여준 공권력의 권위에 감명받았다"는 장관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 "한국 같았으면 폭력 경찰이라고 난리가 났을 걸…, 공권력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한 경제도 성장할 수 없어."
맞는 말씀이다. 한국만큼의 인구와 경제력을 갖춘 나라치고 공권력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국가도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간과한 게 있다. 파리 시민들이 길을 양보하고 문짝을 걷어차는 경찰에 순응한 데에는 '경찰이 폭력까지 동원하는 데에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라는 광범위하고 암묵적인 합의가 깔려 있지 않을까. 더욱 주목할 대목은 시민들의 합의가 결코 쉽게 도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발발 이래 무수한 세월 동안 피를 흘려가며 쌓은 공동의 가치관이 한국의 장관을 놀라게 만들었던 '프랑스 공권력의 권위' 뒤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에게 프랑스만큼의 합의가, 공권력 발동의 정당성에 대한 공감대가 있는지 의문이다. 반칙과 편법의 시대를 살아온 탓이다. 앰뷸런스가 사이렌 소리를 내고 달리면 길을 내주면서도 '혹시 돈 받고 영업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드는 곳이 우리 사회다. 공권력이 국민을 위하기보다 권력의 시녀로 전락해 국민을 탄압하는 도구였다는 기억 역시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한상균 민주노총위원장이 조계사에 숨어들어 자진출두 형식으로 체포되기까지 '공권력 투입'을 둘러싼 갈등도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가 여전히 많다는 반증이다.
갈등은 결국 신뢰와 사람의 문제다. 신뢰 없이는 경제발전도 어렵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의 명저 '트러스트'에 따르면 신뢰는 자유민주주의경제가 발전하기 위한 필수 요소다. 사회적 신뢰도가 높은 국가일수록 경제적 발전의 양과 속도가 무한히 증가한다. 자본과 노동 같은 요소 투입에 의한 성장이 어려워진 마당에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자본의 확충은 더욱 절실하다.
신뢰는 사람의 선택으로 쌓이기도 하고 깨지기도 한다. 갈등 역시 마찬가지다. 불행하게도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대통령들은 뽑아놓고 보면 갈등 치유형보다는 갈등 유발 내지 증폭형 리더인 경우가 많았다. 정치와 경제를 총체적으로 책임지는 대통령이 '네 탓'을 강조하는 한 신뢰는커녕 갈등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여야도 책임을 회피하기는 똑같다. 정치권뿐이랴. 사회 전체가 '네 탓'에 빠져 있다.
미국과 한국형 전투기(KF-X) 개발을 위한 기술 이전 협상 끝에 반쪽짜리 성과에 그친 방위사업청 역시 엉뚱하게 언론을 향해 손가락의 방향을 돌렸다. 미측에서 '한국 언론의 기술이전에 대한 보도가 너무 많고 상세하더라'는 불만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적반하장이며 바보 같은 소리다. 모든 기술을 미국이 다 줄 것처럼 국민과 대통령을 혼란하게 만든 책임을 '네 탓'으로 돌렸을 뿐 아니라 국내 언론의 보도를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기는커녕 거꾸로 꾸중만 듣고 온 셈이다. 국적마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책임 회피와 증폭되는 갈등 속에 경제는 점점 멍들어간다. 모든 통계가 최악이다. 지난해 이맘때쯤 4%대를 장담했던 올해 성장률은 2%대로 주저앉고 2011년 이래 4년간 유지해온 무역규모 1조달러선도 깨질 판이다. 신규고용도 30만명으로 지난해보다 20만명이 적다. 국민소득 3만달러 도달도 놓쳤다. 가계부채와 재정도 악화일로다. 갈등을 유발해 좋지 못한 성적표를 가리는 게 아니라면 '네 탓'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2016년은 화합과 양보, 소통으로 신뢰를 회복하기를 소망한다. '네 탓' 타령은 누워서 침 뱉기일 뿐이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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