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영화감독 김경묵. 많은 사람들에겐 생소한 이름이지만, 국내외 독립영화계에서는 유명인사다. 19세 나이에 첫 단편 다큐 '나와 인형놀이'로 데뷔한 그는 '얼굴 없는 것들', '청계천의 개', '줄탁동시' 등 파격적인 주제와 한국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조명해 호평을 받아 온 무서운 20대 감독이다. 김 감독이 1일 개막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일 영화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는 제작비의 일부를 영화 팬들로부터 받은 후원금으로 충당했다. '와' 할 만한 인기 배우도, 상업무대에서 인지도 높은 감독도 없는 작품이었지만 영화에 공감하고 감독에 주목했던 팬과 시민들의 십시일반이 더해져 717만7,000원의 후원금을 모았다. 당초 목표했던 500만원을 넘는 금액으로, 이 돈은 영화 후반 제작비용으로 쓰였다.
한국영화 시장에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이 새로운 제작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영화 팬이나 시민들로부터 소규모 후원금을 받아 제작비를 마련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크라우드 펀딩 성공사례가 늘어나면서 최근에는 그 영역이 영화를 넘어 출판, 음반, 무용 등 문화예술 콘텐츠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1일 영화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총 100여편의 한국영화가 굿펀딩, 유캔펀딩, 텀블벅, 펀딩21 등 대표 크라우드 펀딩 업체를 통해 제작비의 일부를 모금하는 데 성공했다.
크라우드 펀딩은 말 그대로 대중들(crowd)이 특정 대상에 대한 후원의 성격으로 자금을 모아(funding) 전달하는 것이다. 주요 펀딩 업체의 홈페이지, SNS를 통해 소액 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투자자(후원인)들은 시사회 티켓이나 사인 DVD, 영화 엔딩 크레딧 이름 삽입 같은 보상을 받는다.
크라우드 펀딩 개념이 국내에서 부각된 것은 지난 2012년 개봉한 영화 '26년'을 통해서다. 5·18 광주민주항쟁을 그린 이 영화는 정치적 이유로 투자가 취소돼 두 번이나 제작이 무산됐으나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7억원이 넘는 돈을 끌어모았다. "2012년이 가기 전에 영화를 올리고 싶다"던 최용배 청어람 대표의 바람은 그렇게 실현됐다. 이후 민감한 소재 탓에 투자자를 구하기 힘들었던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100%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비를 마련했고, 다큐멘터리 '탐욕의 제국'도 영화 개봉비용을 후원받았다. 최근엔 대형 마트 노동자들의 애환을 담은 영화 '카트'가 목표 금액 5,000만원을 넘겨 후원을 받았고,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 '화장'과 박해일·신민아 주연의 영화 '경주'도 각각 2억원, 1,000만원을 목표로 펀딩이 진행중이다.
카트와 화장을 제작하고 있는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26년, 또 하나의 약속 등 주제가 민감한 작품이나 예술·독립영화는 상업영화 중심의 대형 투자사들로부터 투자를 받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후원을 통한 제작 성공 사례가 나오면서 상업 영화 중심의 투자 환경에서 비켜있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크라우드 펀딩이 활성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인기 감독이 연출을 하고 인기 배우가 출연한다 해도 대형 배급사의 투자가 없으면 제작비용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크라우드 펀딩이 독립·예술 영화 뿐만 아니라 다수의 주류 영화로도 확산되고 있는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십시일반의 힘은 비단 영화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출판, 무용, 연극, 뮤지컬, 사진, 음반 등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로도 후원 프로젝트의 종류가 확대되고 있다. 실제로 연극 '필로우맨'은 지난해 재공연 비용을 위해 500만원을 목표로 문화예술위원회 산하 문화예술후원센터가 운영하는 '예술나무 크라우드펀딩'에 나서 546만5,000원을 모금하는 데 성공했고, 충무아트홀 무대에 공연을 올릴 수 있었다.
다만 상당수의 기초예술은 영화처럼 일반 대중과의 친밀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모금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강보경 문화예술후원센터 과장은 "대중층이 넓은 영화와 달리 기초예술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선입견이 여전하다"며 "결국 모금을 받기에 앞서 대중들의 공감을 사야 하기 때문에 크라우드 펀딩 내에서도 분야별로 빈익빈 부익부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