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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도, 망망대해(茫茫大海)를 가로지르는 바다의 왕자들이 있었다.
대항해의 역사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들이 있다. 바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페르디난드 마젤란. 지금과 비교해 훨씬 뒤떨어지는 항법과 기술로 각각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최초로 세계일주에 성공했다는 업적 덕에 두 사람은 대항해 시대를 대표하는 바다의 왕자가 됐다. 그런데 이 두 사람보다도 훨씬 전에 이미 아득히 넓은 물결을 헤치고 바닷길을 건넜던 이들이 있다. 지금의 위성항법장치(GPS)도, 그 흔한 나침반과 해양지도도 없었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지후 선배가 날렸던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라는 오글 멘트처럼 그들이 믿었던 건 오로지 바람과 돛, 별뿐이었다.
'뜨거운 지구, 역사를 뒤흔들다' '크로마뇽' 등을 쓴 세계적인 고고학자인 저자는 인류의 가장 초기 항해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 질문한다. 인류는 왜 한 번도 탐험된 적 없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갔는가? 무엇이 사람들을 수평선 너머로 이끌었는가? GPS, 엔진, 나침반조차 없이 어떻게 대양의 머나먼 섬을 정복했는가? 그들은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푸른 수평선 너머로 나갈 용기를 냈던 것일까? 이 책은 우리 선조들이 그들만의 도구와 기술, 사회조직이라는 조건 속에서 바다라는 환경에 대처하고 적응해 나간 도전기를 담고 있다.
최초의 뱃사람들은 오늘날 우리보다 바다와 훨씬 가까웠다. 바다 조상들에게 도구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보잘 것 없는 카누와 뗏목뿐이었지만 지식은 오히려 더 방대하고 세부적이었다. 고대 인류는 별을 보고 방위와 위도를 측정했고, 풍향이 언제 바뀌는지를 오랜 시간에 걸쳐 확인했다. 저자는 말한다. "바다와 인류 사이에 기술이 한 겹씩 늘어날 때마다 인류는 그만큼 바다로부터 멀어졌고, 수천 년에 걸쳐 쌓아 온 경험을 잃고 무지해졌다"고.
GPS 없이 홀로 대서양을 횡단하기도 했던 저자는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대 항해자들의 역사 속으로 노를 저어 간다. 그리고 역사 속 항해자들이 미지의 바다를 향해 끝없이 나아갔던 사연을 복원한다. 기원전 1,200년 경, '라피타인'이라 불리는 해양·농경민족은 바람을 이용해 남태평양 일대를 오가며 장거리 항해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들은 항해를 통해 피지, 사모아, 통가, 바누아투 등 폴리네시아 전역의 무인도를 개척했고, 라피타인의 후손인 폴리네시아인은 돛을 단 카누를 타고 하와이 제도와 뉴질랜드, 이스터 섬까지 정복했다. 라피타인의 항해는 사회조직의 영향이 컸다. 대대로 맏이가 토지, 재산, 특권적 지식을 독점으로 물려받는 사회문화 때문에 아우들은 자신의 가계를 새로 수립하기 위해 식민지 개척에 뛰어들어야 했던 것이다.
기원전 2,600년경 인도양과 지중해의 뱃사람들은 교역 기회를 따라 바다로 나갔다. 이미 이 시기 이집트는 레바논산 통나무를 지중해를 통해 대량 수입하고 있었고, 기원전 1,000년 대에는 크레타 섬의 미노스 문명이 동지중해 무역에 참여했다. 이 시절 바다의 왕자들이 인도양 바다를 해독한 것은 억누르기 힘든 호기심이 아닌, 수입때문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 밖에도 황제의 위엄을 알리려 세상에서 가장 큰 배를 타고 출항한 중국제독, 대구와 청어를 잡기 위해 대서양 바다에 뛰어든 유럽의 어부 등 15세기 유럽의 대항해에 가려 조명받지 못한 바다 풍경을 그려냈다. 소박하지만 광대한 인류의 대항해 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480페이지가 넘는 책의 분량도 부담없이 술술 넘어간다./2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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