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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부르주아가 타계한 후 당대 최고의 여류화가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미국의 개념미술가 로니 혼(55)이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그는 첫 만남에서부터 ‘온몸으로’ 자신의 작품 세계를 얘기한다. 짧게 자른 은발에 까만색 뿔테 안경, 흰 티셔츠와 검정 바지, 검정 워커화를 착용한 그는 나이는 물론 성별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이 같은 모호함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그는 “인간의 경험과 지각 활동이 시간과 장소라는 두 가지 속성에 지배된다”는 전제 아래 동일한 대상의 ‘같음과 다름’을 주제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설명과 개념이 난해하니 작품을 직접 봐야 한다. 국제갤러리 신관 2층에 전시된 ‘이자벨 위페르의 초상’이 대표작이다. 프랑스 여배우 위페르의 다양한 표정을 몇 초 간격으로 찍은 5장의 사진이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 분노와 냉소, 슬픔과 무심함 같은 미묘한 감정 변화도 흥미롭지만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동일한 대상이 보유한 정의 내릴 수 없는 다양성’, ‘잠깐씩 갖게 되는 서로 다른 정체성’에 더 가깝다. 1층으로 내려와 설치작품 ‘투 핑크 톤즈(Two Pink Tons)’를 만나면 그에게 좀 더 빠져들 수 있다. 작품은 똑같아 보이는 핑크색 얼음덩어리 한 쌍. 실제 얼음은 아니지만 마치 아이슬란드의 빙하를 잘라온 듯 표면이 반짝거린다. 작가는 “문화적으로 가벼운 단어로 여겨지는 ‘핑크’와 무거운 단어인 톤(ton)을 함께 사용해 상호보완적으로 배치했다”며 “관람객은 똑같이 생긴 둘 사이의 빈 공간을 오가며 각자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가 한국 관객들을 위해 비교적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누구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범주에서 작품을 접하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나 역사적 배경은 일부일 뿐 더 중요한 것은 ‘각자의 경험’이죠.” 접시 모양을 그린 다음 오려 내 다시 붙여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드로잉 작업과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가늘고 긴 알루미늄 막대에 새긴 ‘화이트 디킨슨’ 등의 작품은 작가의 생각을 응축한 것으로 소장하기에도 좋다. 뉴욕 토박이인 로니 혼은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 출신으로 예일대 조소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 바젤 현대미술관, 이듬해 파리시립미술관, 2000년 뉴욕 휘트니미술관, 2003년 퐁피두센터 등에서 전시를 열었고 지난해 테이트모던에서 연 회고전은 현재 보스턴 ICA에서 진행 중이다. 이번 전시는 10월3일까지. (02)733-8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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