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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기업은 중소기업과는 구분된다. 중소기업과의 관계에서 중견기업은 명백한 강자이며 따라서 경제적 약자로 분류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현재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하도급법을 개정해 중견기업도 중소기업과 마찬가지로 보호대상에 넣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약자 위에 군림하는 중견기업을 보호한다는 것 자체도 말이 되지 않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세계에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형적인 법안이 탄생하는 셈이다.
재계가 봇물처럼 쏟아지는 경제민주화 법안에 대해 우려의 시각을 보내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경제민주화에 글로벌 스탠더드'가 없다는 점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한 고위관계자는 "규제와 견제는 이해가 간다"며 "문제는 규제가 도를 넘어 산업의 발전을 저해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최소한 우리 기업이 해외 기업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이 돼야 한다"며 "다른 국가에는 없는 법안들, 즉 글로벌 스탠더드에 어긋나는 법안들이 기업들의 발목을 잡을까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법안 중 대표적인 것이 대기업 규제다.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고 하지만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법안들이 탄생을 앞두고 있다.
특히 중견기업까지 하도급법 보호대상에 넣는 것은 시장경제 국가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규제다. 국내 하도급법의 모델인 일본 하도급법에서도 중견기업을 수급사업자로 보지 않는다.
더 나아가 중소기업 적합업종을 법으로 지정하는 것도 추진 중이다. 중견기업 보호나 중소기업 적합업종 법제화는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거리가 멀다. A사의 한 고위관계자는 "상생과 일방적인 보호는 다르다"며 "결국 보호가 도를 넘어서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 및 과세도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규제다. 대한상공회의소의 한 관계자는 "세계 규제 사례를 봐도 한국과 같은 일감 몰아주기 규제는 찾아보기 힘들다"며 "글로벌 스탠더드와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일감 몰아주기 증여세 과세는 위헌 소지도 있다. 한마디로 미실현이익에 대해 과세하는 것이 기본 원칙.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위헌 판결을 받은 토지초과이득세와 성격이 비슷하다는 게 재계 및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화학물질 관련 법에서도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법안이 적지 않다. 그 중 하나가 유해물질 유출시 매출액의 5%를 과징금으로 물도록 하고 있는 점. 과징금 기준이 매출액인 사례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과징금이 무겁기로 유명한 가격담합도 전세계에서 관련 사업 매출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게다가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은 소량의 화학물질도 일일이 등록해야 한다. 이 규정은 전세계에서 화학물질 규제가 세기로 유명한 유럽의 리치(REACHㆍ화학물질규정)보다 강도가 높다.
화학업계 관계자는 "대기업이야 충분히 대응하겠지만 중견ㆍ중소기업의 경우 수출에 앞서 우리나라 규제에 발목을 잡히는 셈이 된다"고 우려했다.
상법은 반(反)글로벌 스탠더드의 표본이다. 집행임원을 의무화하고 감사위원 선임시 대주주 의결권을 3% 등으로 제한하는 등의 조항들은 세계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조항이다.
배상근 전경련 경제본부장은 "상법은 한국 기업에 획일적인 지배구조를 요구하고 있다"며 "전세계 어느 국가도 지배구조에 대해서는 자율성을 보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주회사 규제도 한국만의 독특한 사례다. 대다수 국가들이 지주회사에 대해 규제보다는 완화를 통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지주회사도 규제의 대상으로 보고 갖가지 규제장치를 두고 있다.
경제민주화 속에 숨겨진 반글로벌 스탠더드 조항은 외국 기업의 한국 투자를 막는 걸림돌로도 작용하고 있다. 외투 기업들이 한국에서 영업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법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한 외투 합작법인 관계자는 "최근 외투 합작 파트너로부터 한국 경제민주화의 과도 법안에 대해 어떻게 돼가느냐,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등의 문의사항이 크게 늘고 있다"며 "외국인 투자 유치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모 그룹 고위임원은 "한국 기업은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해외 기업과 경쟁하며 살아남고 있다"며 "최소한 세계 기업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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