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당시 증권가는 말 그대로 축제 분위기였다. 코스피지수가 1,500포인트선에 올라선 지 불과 한 달 만에 1,600선을 넘어서더니 파죽지세로 상승하며 두 달여 만에 '꿈의 지수'로 불리던 2,000포인트 고지까지 돌파했다. 주식형 펀드로는 국내형이나 해외형을 가릴 것 없이 돈이 밀려 들어왔고 증권사들의 주가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이처럼 유례 없는 호황이 이어지자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들은 너도 나도 해외 진출에 관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중국ㆍ동남아시아ㆍ중앙아시아ㆍ러시아ㆍ브라질ㆍ동유럽 등 세계 곳곳에 포진한 금융회사들사와의 제휴나 신규 투자, 해외증시 관련상품 출시 등을 통해 글로벌 투자은행(IB)으로의 도약을 선언했다. 곧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 글로벌 IB가 탄생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증권가의 이 같은 들뜬 모습은 2008년 하반기 이후 잠잠해졌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리먼브러더스와 같은 대형 IB가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성공적인 해외 IB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하게 됐다.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본격적인 해외투자 직전에 리먼 사태가 터져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해외 진출 늘어도 경쟁력은 '글쎄'=국내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는 최근 3년 동안 해외 진출을 강화해왔다. 증권사들의 경우 자본시장법 시행을 앞두고 IB 업무를 강화하기 위해, 자산운용사들은 해외펀드 열풍에 따른 수요충족을 위해서였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증권사의 해외점포 수는 2005년 말 30개에서 2008년 말 64개로 증가했고 자산운용사들의 경우 같은 기간 1개에서 16개로 늘어났다. 은행권의 해외점포 수가 1997년 257개에서 2008년 9월 말 현재 125개로 줄어든 것과 비교하면 증권ㆍ자산운용사의 해외 진출은 크게 강화된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규모나 인력ㆍ경영능력 등에서 선진국 IB보다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데 있다. 한국금융연구원에 따르면 2007년 말 국내 최대 증권사와 아시아 최대 증권사의 자기자본 격차는 2.7배, 자산운용사의 운용자산 격차는 96.2배에 달했다. 금융인력의 전문성도 낮은 수준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5월 발표된 국제경영개발연구원의 '국제경쟁력 연감'에 따르면 국내 금융전문인력 인력풀 순위는 44위에 불과했다. 경영인의 국제적 경험 역시 하위권인 48위였다. ◇속도 늦추는 대신 '실속'에 초점=증권사와 자산운용사들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경쟁력 부족을 절감했고 해외 진출을 위한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인재를 육성하는 동시에 해외 우수인력을 유치하고 해외 리서치 능력도 강화하고 있다. 해외사업을 추진하면서 속도를 늦추더라도 '돌다리도 두들겨보며 길을 간다'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도전 대상 지역도 '세계'에서 '아시아'로 일단 좁혀 잡았다. 중국을 비롯해 캄보디아ㆍ베트남ㆍ라오스ㆍ카자흐스탄ㆍ말레이시아 등 아직은 자본시장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으나 '성장 잠재력'이 높은 신흥시장을 노리고 있다. 특히 신규진출 확대에만 관심을 쏟지 않고 홍콩처럼 이미 오래 전에 진출해 현지법인이나 사무소를 둔 지역에서 네트워크를 새로 점검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박준현 삼성증권 사장은 "과거 세계경제의 중심이 서구권에 있을 때 이들 지역 금융회사들이 글로벌 금융회사로 떠오른 것처럼 앞으로는 아시아 지역 증권사가 곧 글로벌 증권사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시아 중심 해외 진출은 '일장일단' 있어=아시아 지역에는 베트남ㆍ캄보디아ㆍ라오스ㆍ말레이시아ㆍ인도네시아ㆍ카자흐스탄ㆍ몽골 등 발전 가능성이 큰 이머징마켓들이 많다. 특히 이들 지역 중 상당수는 자본시장 발전이 초기 단계다. 다시 말해 기존 글로벌 IB들도 기득권을 확보하지 못한 곳이어서 국내 증권사들의 시장 진출 및 경쟁이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동양종금증권이 캄보디아에서 공기업 IPO 업무를 독점할 수 있는 지위를 확보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유준열 동양종금증권 사장은 "캄보디아의 자본시장 구축과 공기업 공개를 위해 회사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을 것"이라며 노력 끝에 잡은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하지만 아시아 지역 집중 전략에는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점도 있다. 성장 잠재력과 문화적 동질성 등은 분명히 장점이나 이들 지역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글로벌 금융산업 관점에서 고위험ㆍ고수익으로 분류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리스크 분산 효과가 제한적이다. 서병호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들 지역은 증시 자금유입 둔화 또는 유출시 주가하락에 따른 유동성 위험, 과도한 유동성 유입에 따른 오버슈팅 가능성이 있다"며 "해당국 금융 관련 규제의 변동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서 연구위원은 "베트남 등 특정 국가로의 쏠림현상도 문제"라며 "해외 진출에 앞서 해당 지역에 대한 연구를 강화하고 전문인력 양성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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