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전 ‘마지막 프러포즈’ 내년 1월16일까지
| 여자,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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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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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드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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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터널 션샤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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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주말입니다. 가족, 연인을 위한 이벤트는 준비해 놓으셨는지요. 아차, 아직 준비 못하신 분들 꽤나 난감하시죠? 볼 만한 공연은 이미 매진, 멀티플렉스 극장을 가도 볼 만한 사람은 다 본 ‘태풍’과 ‘킹콩’ 말고는 그리 눈에 띄는 영화가 없어 보입니다.
그 심정 이해하고, 이번 주는 조금 ‘특별한’ 영화 이벤트를 소개합니다. 대학로에 위치한 극장 ‘하이퍼텍 나다’에서 지난 17일 시작해 내년 1월 16일까지 열리는 ‘마지막 프러포즈’입니다. 올해 개봉작 중 작품성 하나는 최고지만, 이리저리 치여 관객과 충분히 만날 기회가 없었던 영화들을 모아 재상영하는 기획물이죠.
2000년 시작해 올해로 다섯 해째를 맞는 이 행사는 개봉 때 놓친 좋은 영화를 스크린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기회입니다. 남들 다 보는 블록버스터와는 차원이 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선보이는 작품 24편은 하나하나 모두 영화 담당 기자로선 놓치기 아까운 작품입니다. 너무 많아서 뭘 봐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24편 중 온전히 기자의 ‘편견’으로 딱 네 작품만 꼽아 드리겠습니다.
‘사이드웨이’: 별볼일 없는 3류인생 우스꽝스럽지만 따뜻한 이야기
소설가가 되고 싶지만 번번이 출판사에서 거절당하는 대머리 영어선생 마일즈. 오랜 친구 잭은 ‘안 나가는’ 3류 배우이면서 대책 없는 플레이보이. 잭의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둘은 함께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꼬이고, 바보 같은 선택에 난감해지지만 그들은 안다. 별 볼일 없어도, 그게 인생인 것을.
영화 속 등장하는 갖가지 와인과 둘의 우스꽝스런 에피소드가 영화의 재미. 그러나 설렁설렁 흘러가는 영화는 언뜻 스산한 풍경으로 인생의 ‘옆길’을 조용히 되뇌인다. 결국 둘은 인생의 ‘제 길’로 들어온다.
물론 행복하지만은 않다. 그래도 그 삶엔 따스한 온기가 있다. 영화는, 그 온기를 전한다. 이 글을 쓰는 기자의 ‘편견’으로 꼽는 올해 최고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 12살 가장과 세 동생의 ‘너무나 슬픈’ 세상살이
잔인하다. 피 한 방울, 눈물 한 모금 흘리지 않은 채, 담담하지만 분노한다.
영화엔 네 명의 아이들이 있다. 엄마는 같은데 아버지는 다 다르다. 엄마는 ‘사랑에 빠져서’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 12살 맏이 아키라가 가장이 됐다. 편의점에서 유통기한 지난 김밥을 먹이며 하루하루를 연명하지만, 동정은 구하지 않는다. 그게 더 눈물겹다. 영화를 보며 관객은 외칠 터. “차라리 불쌍한 눈으로 울어보라고.”
묵묵히 한 걸음 떨어져 지켜보는 아이들의 불행이 처절할 정도로 슬픈 영화. 연말, 들뜬 분위기와는 맞지 않다고 치부하기엔 영화의 메시지를 허투루 넘길 수가 없다.
맏이를 연기한 아키라 유야는 지난해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뻔한 신파만이 슬픈 영화의 전부라고 믿는 한국 관객에게 ‘정말 색다른’ 감성을 던지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 현재와 과거, 기억과 현실의 조각 맞추기 게임
‘마스크’의 초록 가면 짐 캐리는 잊어라. ‘타이타닉’ 연인 케이트 윈슬렛도 지워라.
‘존 말코비치 되기’ ‘컨페션’ 등으로 영화적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온 찰리 카우프만이 다시 한 번 ‘이상한’ 영화를 만들었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고 기억과 현실이 뒤섞이면서 혼란의 퍼즐 조각은 제 짝을 찾아 나간다.
그 중심엔 뻔하디 뻔한 로맨스가 있다. 첫 눈에 반한 연인. 서로를 바라만 봐도 세상 부러울 것 없던 행복한 커플. 시간은 흐르고, 서로의 차이를 알아가면서 고통은 시작된다. 둘은 원한다. 아예 행복했던 기억 조차도 말끔히 지워버리길.
하지만 인연이 그렇게 쉽게 끝날 순 없다. 전문가의 최첨단 장치로 두뇌 속 기억을 제거하던 둘, 이젠 그 사라지는 기억을 필사적으로 붙들기 시작한다.
있을 수 없는 공상 속 이야기를 이처럼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건 분명 작가의 탁월한 능력이다. 조금 소원해진 커플들이여. 이 영화가 당신들을 어루만져줄 터.
여자, 정혜: 끝없이 무심한 일상, 그 속에서 발견하는 우리들 모습
이토록 무심해 보이는 일상이 있을까. 방 안에선 하루 종일 TV소리만 흘러나온다. 그러다 홈쇼핑에서 김치도 산다. 배가 고파지면 김밥과 컵 라면으로 때우고, 그것마저 귀찮으면 대충 아무거나 시켜 먹는다. 우편취급소라는 소박한 직장에선 수다스럽고 발랄한 직장 동료들이 끊임없이 정혜를 유혹한다. 그래도 그녀는 멍하다. 그리고 카메라는 여자, 정혜를 그 흔한 삼각대 하나 받치지 않고 떨리는 손에 쥐여진 채 그녀를 바라본다.
정혜는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무심한’ 캐릭터다. 그 ‘무심함’ 뒤에는 정혜, 아니 우리 모두가 갖고 있을 만한 상처와 번민이 변변한 대사 하나 없이 여백 속에 뚝뚝 묻어난다. 손님 하나 찾아오지 않는 아파트에 3중 열쇠를 걸어 잠근 정혜의 뒷모습은 혹시 지금 이 시간을 사는 우리가 아닐지. 이 영화 한 편으로 중고 신인감독 이윤기는 단박에 한국 영화계의 샛별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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