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에 있는 IT기업에 다니는 김승규(29·가명)씨는 회사 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수입맥주 '마니아'다. 수입맥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기본이고 각국 맥주 병을 모은 자신만의 공간도 집안 한켠에 마련했다.
새로 물 건너온 맥주가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바로 달려가 사들이는 취미생활을 즐긴 지도 오래다. 김씨에게 수입맥주는 삶의 피로를 풀어주는 회복제이자 집을 꾸미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자리잡았다. 김씨는 "수입맥주는 국산맥주와 달리 디자인이 화려해 맛과 함께 보는 즐거움도 준다"며 "각양각색의 디자인을 지닌 병뚜껑도 따로 모아 컬렉션으로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입맥주처럼 새로운 맛으로 한번,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또 한번 소비자의 이목을 끌면서 맛만이 아닌 눈으로까지 즐기는 포장 패키지 마케팅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 패키지 디자인 업체 '브라비스인터내셔널'의 사사다 후미 대표는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은 바로 '끌림'으로 상품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 호소한다"며 "매장은 소비자가 눈길을 던진 0.2초만의 전쟁이 펼쳐지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포장 패키지가 곧 브랜드라는 인식에 따라 소비재 업체마다 제품 상품력 외에 차별화된 포장 디자인을 새로운 생존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수입맥주가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국내 수입맥주 물량은 8만8,682톤으로 지난 2012년보다 18.6% 늘었다. 화려한 디자인의 수입맥주는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오감으로 즐기는 주류로 각광을 받으면서 2003년 2만710톤에 그치던 수입물량이 10년 만에 4배 이상 늘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반면 패키지 디자인 면에서 뒤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국내 맥주업계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숨겨져 있다. 주류업계의 한 관계자는 "수입맥주가 국산맥주와 달리 인테리어 소품에 버금가는 디자인으로 고객의 이목을 끌 수 있는 것은 국내외 주세법 차이 때문"이라며 "용량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는(종량세) 외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병과 라벨 등에도 세금을 부과하는(종가세) 방식을 채택하고 있어 디자인 측면에서 수입맥주에 열세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는 라벨 등의 변경에 소요되는 비용까지 세금을 부과하고 있어 수입맥주처럼 화려한 색상과 디자인을 추구하기가 쉽지 않다 보니 '체감하는 맛'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와인업계는 라벨의 숫자에 숨겨놓은 스토리텔링 마케팅으로 제품 탄생의 비밀을 알려주는 등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비밀이 숨은 숫자를 통해 소비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제품의 특징을 함축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식이다. 하이트진로의 '보데가스 랑아 파이 3.14레드'는 패키지에 3,081개의 숫자들이 새겨져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진 와인이다. 원주율을 나타내는 'π'를 상표로 한 이 와인은 스페인 토착 포도 품종인 콩세혼의 재배면적인 3.14㏊의 이름을 따 'PI-3-3.1415...'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국내에서 18홀을 65타에 치기를 기원하다는 의미로 해석돼 대표적 골프와인으로 꼽히는 칠레산 와인 '1865'나 포도나무 품종번호인 337을 와인 이름으로 정한 미국산 '337 까베르네 소비뇽' 등도 숫자를 상품명이나 디자인으로 색다르게 표현한 제품 중 하나로 꼽힌다.
식품업계에서도 제품 패키지 디자인은 기능성을 개선하면서 다양한 마케팅 활동으로 소비자의 관심을 이끌어내 매출을 높이는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농심은 소치 동계올림픽을 겨냥해 지난해 11월 '꿀꽈배기' '자갈치' '오징어집' '포스틱' 등 스낵 브랜드 제품 패키지에 스키점프·아이스하키 등 겨울 스포츠 그림을 삽입했다. 패키지 변경 이후 이들 4종 제품의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 늘어났다. 농심은 지난해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시즌을 맞아 국내 대학 패키지디자인학과와 산학협력을 통해 '츄파춥스' 특유의 팝아트 느낌에 사랑고백의 의미를 재해석한 디자인의 츄파춥스 프러포즈 에디션을 선보여 지난해 2~3월 매출이 2012년 같은 기간보다 20% 늘어난 성과를 맛봤다. 농심의 '수미칩'은 포장지에 제품의 강점을 강조한 사례다. 수미칩은 지방 함유량이 기존 감자칩 제품보다 20~30% 낮다는 문구를 2012년 말부터 제품 포장에 삽입했고 2013년 수미칩 매출은 2012년보다 60%나 올랐다.
농심 관계자는 "패키지 디자인에는 해당 제품만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며 "제품의 특징, 원료, 타깃 고객 등을 감안해 색 배치와 캐릭터 등을 변경해 소비자에게 좋은 반응을 얻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1~2인 가구 및 야외활동이 증가하는 추세에 맞게 제품 패키지를 개선해 성공한 사례도 있다. 오리온은 소용량 제품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있다고 보고 2012년 스낵제품 '미쯔'를 소용량 2팩으로 구성해 다시 선보였다.
미쯔는 1995년 출시된 장수 제품임에도 패키지 변경에 힘입어 지난해 매출이 2012년보다 50%나 늘어났다고 오리온 측은 전했다.
팔도는 1990년 출시된 컵라면 제품인 '왕뚜껑'의 패키지 디자인을 전면적으로 개선한 제품을 지난해 6월 선보여 매출 상승을 이끌어냈다. 원래는 뚜껑을 없앴다가 매출이 확연히 급감하자 다시 라면 뚜껑을 살린 케이스다.
소비자들이 컵라면을 먹을 때 김치나 삼각김밥 등 밥이나 반찬을 곁들여 먹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착안해 기존에는 평평한 모양이었던 뚜껑을 3등분해 여러 종류의 반찬을 뚜껑 위에 올리기 편하도록 디자인하자 리뉴얼 직후인 지난해 3·4분기 매출이 2·4분기보다 30% 늘어났다.
한국야쿠르트가 얼려 먹는 발효유 제품으로 지난해 선보인 '얼려 먹는 세븐'은 기존 얼려 먹는 발효유 제품인 '요러케'의 2012년 매출보다 4배나 급증한 200억원의 연 매출을 기록했다. 얼려 먹는 세븐은 바 형태인 요러케와 달리 얼린 상태에서도, 녹은 상태에서도 먹을 수 있고 어린이들이 함부로 내용물을 삼키지 않도록 제품 입구를 좁은 원형구 형태로 만들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패키지 디자인뿐 아니라 패키지에 붙인 명칭도 매출 성장에 도움이 된다.
KGC인삼공사는 2011년부터 명절 선물세트에 새로운 패키지 디자인과 함께 '려원' '보윤' '가인' '수연' 등의 이름을 도입해 선물세트의 매출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2011년 설 프로모션 기간 매출의 5% 수준이었던 선물세트 비중은 지난해 9%, 올해 11%로 늘어나는 추세다. 2000년만 해도 '정관장 1호' '정관장 스페셜 A호'처럼 일반적인 이름을 붙이다 기억하기 쉽게 직관적이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줄 수 있도록 했다는 게 KGC인삼공사 측의 설명이다. 이와 함께 유화 느낌의 화사하고 밝은 디자인과 한지 느낌의 자연친화적인 소재를 포장지에 도입했다.
패키지 디자인 개선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사례도 있다. 롯데제과의 'ID/트리뷰껌'은 지난해 12월 디자인계에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독일의 'IF 어워드 2014'에서 식품 및 패키징폼 디자인 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롯데제과 관계자는 "IF 어워드 수상은 국내 제과업계에서는 처음으로 제품포장과 단위포장이 독창성·활용성·심미성·경제성 등에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안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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