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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영주권자인 이동건(가명)씨는 최근 거래은행을 찾아 보험과 주가연계증권(ELS)·펀드 등 50억원어치의 금융자산을 정리했다. 중도해지에 따른 손해는 컸다. ELS는 환매수수료가 5%나 됐다. 하지만 손실을 떠안는 것이 해외금융계좌납세협력법(FATCA) 이행으로 벌금을 무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이씨는 현금화한 자산 중 5억원을 다른 은행에 분산 예치했다. 나머지 현금은 주식·부동산·실물자산 등에 나눠 투자할 계획이다.
FATCA 이행 개정안 의무적용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으면서 미국 시민권자나 영주권자 등 모니터링이 되는 자산가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금융자산만도 10억원이 넘는 고액 자산가들이 많아 머니무브(자금이 은행예금에서 증시와 부동산 등으로 이동하는 현상)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영아 기업은행 PB고객부 과장은 "자산가들의 반응이 금융종합소득과세 기준 하향 조정 때를 방불케 한다"며 "비과세 한도나 예금안정성을 감안할 때 보험사나 저축은행은 대안투자처로 마땅치 않아 실물자산이나 상대적으로 안정성이 뛰어난 2금융권으로의 자금이동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7일 금융계에 따르면 오는 7월부터 시행되는 FATCA 이행 개정안에 따라 국내 금융사들은 미국 납세자가 소유한 5만달러 이상의 금융계좌를 미 연방국세청에 직접 보고해야 한다. 신고 대상은 미국 시민권자·영주권자 중 한국 금융회사에 5만달러 이상의 금융계좌를 갖고 있거나 만기 때 돌려받는 총액이 25만달러 이상인 저축성보험 보유자 등이다. 개정안의 핵심은 신고의무를 기존 개인에게서 금융사까지 확대했다는 것. FATCA를 이행하지 않는 금융사로 분류될 경우 미국 원천소득(이자ㆍ배당 등)의 30%가 원천 징수된다. 이 정도 징벌은 사실상 미국 내에서 영업을 하지 말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금융사 입장에서는 반드시 따라야 한다.
미 조세당국의 재산신고의무 제도는 그 전에도 있었다. 1만달러 이상을 해외 금융계좌에 예치한 자국민에게 1년에 한번씩 명세를 신고하도록 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상대 국가의 협조 없이는 계좌정보 확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본인이 신고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금융사 신고로 자산현황이 고스란히 노출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고를 기피해온 자산가들이다. 미신고 사실이 적발되면 계좌당 1만달러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그러나 고의탈세로 확인되면 10만달러 또는 계좌잔액의 절반 중 큰 금액의 과태료가 부과되며 25만달러 이하의 벌금 또는 5년 이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시중은행 PB센터에는 FATCA 이행에 따른 불이익을 피하기 위한 자산가들의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 박정국 외환은행 PB본부 세무팀장은 "세금회피가 드러날 경우 감당해야 하는 페널티가 워낙 커 자산가들의 문의가 크게 늘고 있는데 모니터링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 외에 마땅한 대안이 없는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신고의무를 이행하지 않아온 자산가들이 선택할 대안은 많지 않다. 모니터링 대상에서 제외되려면 금융자산을 5만달러 이하로 축소하거나 국적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자산가들은 우선 한 금융사에 집중됐던 금융자산을 분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현금화한 자산을 가족 명의로 각각 다른 은행예금에 분산 예치하거나 부동산이나 금 같은 실물자산, 단위신협ㆍ새마을금고 등과 같은 FATCA 이행 제외 대상 금융기관으로 자산을 옮기는 것이다.
일부 자산가 가운데는 대여금고에 현금을 묻어두는 식의 '우회전략'을 쓰기도 한다.
김태희 하나은행 세무사는 "FATCA는 2010년부터 계속돼온 이슈여서 자산가들이 각자의 스타일대로 대응전략을 마련해왔다"며 "예금 분산예치부터 국적포기까지 매우 다양하다"고 전했다.
미 재무부가 4월 연방관보에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 국적 포기자 수는 2008년 231명에서 지난해 3·4분기 말 현재 2,369명으로 10배가량 급증했다. 이 같은 결과는 2010년 발효된 FATCA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자산가들의 움직임이 본격화할 경우 머니무브가 발생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일반적으로 미국 시민권자·영주권자 등 FATCA 모니터링 대상은 국내 금융사의 대표적 고액자산가 계층으로 분류된다. 김탁규 기업은행 PB고객부 세무사는 "PB시장에서는 FATCA를 (머니무브를 일으킬) 태풍의 핵으로 보고 있다"며 "신고 대상 명단이 확정되는 6월 말 이후 본격적인 자금이동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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