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이 다 끝나도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을 겁니다." 배우 정보석(사진)은 요즘 2시간을 채 못 잔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대본을 뒤적이다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했지'라는 자학과 함께 다시 잠자리에 든다. 연기 경력 30년의 베테랑 배우에게 불면의 밤을 선사한 주인공은 미국 추상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마크 로스코다.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서 만난 정보석은 오는 5월 3일 개막하는 연극 '레드'에서 맡은 마크 로스코 역을 "30년 연기인생에서 가장 힘든 배역"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레드는 로스코와 그의 조수 '켄'의 대화로 전개되는 2인 극으로, 두 사람은 예술에 대한 견해로 격렬한 논쟁을 벌이며 철학과 예술을 뛰어넘는 생명과 죽음, 젊음과 노년, 구세대와 신세대의 충돌을 그려낸다.
정보석은 2011년 레드 초연을 본 뒤 먼저 출연 의사를 내비칠 정도로 이 작품에 의욕을 보였다. 자신의 삶과도 닿아 있는 현실적인 드라마가 강렬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극 중 로스코는 후세대 화가들에게 밀려나고 거기에 분개해요. 저도 배우로서 후배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고 있잖아요. 좋게 말하면 '순환'일 테지만, 배우로서 구세대로 밀려나긴 싫다는 점에서 공감이 컸죠." 서로 다른 사고로 대립하는 로스코와 켄의 관계를 보며 평소 엄격하기만 했던 교수이자 아버지로서의 자기 자신도 반성할 수 있었다.
그토록 바랐던 작품이지만, 로스코에 다가가는 길은 여전히 고되기만 하다. "관객으로만 봤어야 할, 배우에겐 최악인 작품"이라고 말할 정도다. 정보석은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그러나 개연성은 없는 대사가 많아 대본을 받아들고 바로 후회했다"며 "로스코가 어떤 이유로 어떤 감정을 갖고 그런 말을 했는지 찾아내는 작업이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고 설명했다. 직접 로스코의 작품을 보고 나니 손에 잡히지 않던, 심오하기만 했던 한 인간이 조금은 이해됐다. "로스코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얇게 여러 겹을 칠해놓았어요. 사람도 자신이 지나온 과정과 그때의 감정이 켜켜이 겹쳐져 지금 자신의 삶이 있는 거잖아요. 치열하게 캔버스로 옮겨 놓은, 로스코 본인도 설명할 수 없는 '날것으로서의 순간의 감정'을 바라보며 '아, 이 사람이 말 갖고 잘난 척만 하는 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여전히 로스코를 모르겠고 궁금하다는 그는 "인터뷰에서 이만큼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도 다행"이라며 "(연습기간) 한 달 반을 헛살지는 않은 것 같다"고 웃어 보였다.
"보는 사람까지 고통스러울 필요는 없어요." 정보석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메시지와 대사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오히려 관객이 대사에 현혹되어 '말'을 따라가다 보면 연극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일 중 몇 개가 내 것으로 쌓이겠느냐"며 "연극도 편안하게 즐기다가 자기 마음에 들어오는 말을 제 것으로 만들면 된다"고 강조했다. 관객 정보석이 자기 삶과 닿아 있는 로스코의 일면을 발견했듯 말이다.
"그 시간만큼은 한 가지에 온전히 '미칠 수 있어서' 연극이 좋다"는 천상 배우. 정보석의 치열한 고민이 담긴 연극 '레드'는 5월 31일까지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관객과 만난다.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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