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36년 일본이 세운 괴뢰정부 만주국 국무원 총리를 지낸 그는 일본의 패전으로 A급 전범으로 기소됐다 1948년 석방됐다. 일본 여당인 자유민주당 창당을 주도했으며 1957년 총리에 취임해 패전 후 일본의 '피점령 체제'를 바꾸기 위한 안보조약개정 작업에 착수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전쟁을 금지한 일본 평화헌법 개정과 자주국방을 추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79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한때 일본 정계의 황태자로 불렸지만 두 차례나 총리 도전에 실패한 아베 신타로는 그의 사위며 일본 총리 아베 신조가 그의 외손자다.
日 과거사 왜곡에 美 옹호 입장 보여
아베 신조는 정계 입문 이후 종종 "아버지(아베 신타로)보다 외할아버지(기시 노부스케)의 DNA를 이어받았다"고 말하곤 했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로 지난 2012년 일본 96대 총리에 오른 아베 정부 출범 이후 과거사를 둘러싼 한중일 삼국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의 과거사 부정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적절한 외교적 수사로 어물쩍 넘어가던 이전 정권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예 한국과 중국의 반응에는 관심조차 없는 듯한 분위기다. 독도의 영유권 주장을 넘어서 최근에는 교과서 검정에까지 노골적으로 개입하면서 일본 내 역사학자 사이에서조차 폐기된 임나일본부설까지 들고 나왔다
아베 총리 가문을 들여다 보면 이 같은 노골적인 역사 뒤틀기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추진하는 자위대 무장, 평화헌법 개정은 기시 노부스케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의 역사인식과 정책은 그의 외조부가 총리직에 오른 1957년으로 회귀해 있는 셈이다. 오히려 그동안 과거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중재자 역할을 자처해온 미국의 미묘한 입장 변화가 우리를 더 당황스럽게 한다.
최근 미국 정부는 아베 정부의 막장 드라마에 은근히 호응하며 맞장구를 치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 지난 3월 초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은 위안부 문제, 역사교과서 내용, 해역의 이름 등을 놓고 벌어지는 한중일 삼국 간 갈등에 대해 "이해는 하지만 실망스럽다"며 "과거 문제가 미래 협력을 제한하는 일이 불행하게도 아주 많다"고 언급해 논란을 빚었다.
아베가 위안부 문제를 두고 "인신매매"라고 표현하자 이번에는 곧바로 대니얼 러셀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긍정적인 메시지"라며 맞장구를 쳤다. 물론 발언이 논란이 되자 뒤늦게 여론 무마용 해명이 잇따랐지만 최근 과거사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확실히 일본을 감싸고 있다.
과거사에 대한 미국의 입장 변화 배경에는 보다 현실적인 필요성이 깔려 있다. 냉전 시대 이후 세계 경제·정치의 패권자로 군림하던 미국은 지금 중국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남중국해는 물론 미국의 턱밑인 라틴아메리카까지 중국으로부터 거침없는 정치·경제적 압박을 받고 있다. 당초 예상을 뛰어넘고 대부분의 선진국을 아우르며 50개국이 훨씬 넘는 국가가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참여한 것은 중국이 더 이상 미국 패권에 대한 잠재적 도전자가 아니라 현실의 위협임을 단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주변국의 심기를 건드리면서도 미국이 일본에 잇따른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이면에는 중국의 거센 도전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경제 전략이 깔려 있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국은 보이지 않는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도발이 잇따르고 미국은 이를 대놓고 이를 지지하고 있음에도 우리 외교 당국은 뒤늦은 항의 외에 이렇다 할 대응조차 못하고 국내에서만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소극적 항의, 적절한 대응 아냐
우리 정부는 과거사를 둘러싼 일본 정부의 도발 때마다 '차분하고 단호한 대응'이라는 외교 원칙을 강조해왔다. 이번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 '차분한' 대응이 과연 적절한가를 놓고 논란은 커지고 있다.
아베 총리는 오는 26일부터 5월3일까지 미국 순방길에 오른다. 일정 중에는 일본 총리로는 사상 최초의 상하원 합동연설도 예정돼 있다. 미국 의회에서 아베 총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대충 과거사를 덮고 '미래'를 향해 나가자는 연설을 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 정부는 안방에서 차분하고 단호한 대응을 반복하고만 있을 것인지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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