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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 나의인생/나춘호 예림당회장] 21.“어린이 책은 예림당”
입력2003-05-15 00:00:00
수정
2003.05.15 00:00:00
김희원 기자
예림당을 창업할 당시 내 나이는 서른 한 살로 출판인으로서는 연소한 편이었다. 출판에 몸 담을 당시 나는 지켜야 할 기준을 하나 세웠다. 그것은 바로 `좋은 책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것이었다. 이 생각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어 요즘도 직원들에게 `독자들이 필요로 하는 책을 보다 잘 만들어 저렴하게 공급하는 것이 최상의 서비스`라고 수시로 강조한다.
이런 의지가 투영된 덕분인지는 몰라도 기획해서 출간하는 책들은 모두 반응이 좋았고 서점가에서는 `잘 나가는` 책으로 꼽히게 되었다. 어느 샌가 서점을 하려면 어린이 책으로는 예림당 책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 돌아다닐 정도로 예림당은 창업 3년 만에 주목 받는 출판사로 자리매김했다.
76년 12월에는 기존 그림책 시리즈를 추가해서 내는 것 외에도 `아기 큰 그림책 시리즈` 5종을 출간했다. 그 책은 보통 그림책의 두 배나 됐는데 상당기간 국내 출판계에서 가장 큰 그림책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처럼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책을 공급했던 대구 문화서점이 경영난에 봉착했다는 소문이 나돌더니 급기야 77년 4월1일 부도가 났다. 문화서점은 경북에서는 가장 큰 도매상으로 삼신서적과 더불어 경북 일대 군소서점에 책을 공급해 왔다.
처음 부도설이 돌자 대부분의 출판사는 책 보내는 것을 중단하고 공급했던 분량까지 회수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어렵게 출판을 시작할 때 선어음으로 지원해 준 고마운 서점이었던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부도설이 나도는 곳에 책을 공급하는 것은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이나 다름없는 무모한 짓이라고 만류했지만 나는 의리를 저버릴 수 없어 주문하는 대로 계속 책을 보내 주었다.
부도설로 어려움을 겪던 문화서점은 `봐라, 예림당에서 이렇게 책을 계속 보내 주는데 무슨 부도냐` 하고 다른 출판사를 설득하기도 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결국 부도가 나면서 100만원 가까운 손해를 보았고, 설상가상 한 달 뒤에는 삼신서적까지 문을 닫아 70만원 상당의 손해를 또 보게 되었다.
한 달 사이 170만원의 손해는 충격일 만큼 큰 금액이었다. 처음엔 망연했다. 하지만 단념하는 데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내가 처음 출판을 시작할 때 그들이 선어음을 끊어 주며 보여준 애정어린 격려는 액면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문화서점은 5만원, 삼신서적은 3만원의 선어음을 끊어 주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거래하던 서점들을 돌아다니자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큰 손해를 보고도 어찌 그렇게 태연하냐”고 물었다.
“그럼 우얍니까?” 그게 나의 대답이었다. 문화서점과 삼신서적이 부도가 나기 전에 발행했던 어음은 아직도 내 금고 속에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전국 대형 서점들이 부도설에 휘말리면서 서점계와 출판계에는 적지않은 시련이 밀어닥쳤다. 당시 서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도서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였다. 교과서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정부가 발행하는 `국정`과 민간 출판사에서 만들어 정부승인을 받아 서점을 통해 공급하는 `검인정`이 있었는데 출판사는 출판사대로, 서점은 서점대로 판매경쟁이 치열하던 시절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로간에 벌이는 경쟁이 그야말로 `출혈경쟁`이다 보니 출판사 입장에서는 교과서가 채택돼도 손해를 보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되면서 경영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출판사와 서점경영을 압박했다.
여기에다 국세청은 `검인정` 교과서를 내는 출판사의 탈세혐의를 포착, 엄청난 금액을 추징했다. `교과서 파동` 또는 `검인정교과서 부정사건`으로 불리우는 이 사태는 궁극적으로 출판계의 판도까지 바꾸는 엄청난 파장을 남겼다.
<김희원기자 heewk@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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