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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1997년 가봉 취재여행에서 '엘프사건'을 목도한다.
엘프사건은 프랑스 석유회사 엘프 아키텐과 프랑스 정계고위층, 가봉의 통치자 오마르 봉고를 연결하는 거대한 부패 시스템을 드러낸 것이었다. 프랑스 수사 검사들은 서류상의 흔적을 쫓던 중 가봉,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저지 등의 조세 피난처를 만날 때마다 사건의 실마리를 놓쳐버렸다. 조세 피난처라는 역외의 거대한 비밀주의에 막혀 더 이상 수사가 진전되지 못했던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빠져나온 돈은 어디로 갔을까?
저자는 2005년이 돼서야 실마리를 잡는다. 미국 정부가 해외로부터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면세 혜택과 비밀주의를 제공해 자금을 유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는 곧 미국 정부의 글로벌 전략의 핵심이었으며, 바로 이와 같은 인센티브상의 조그마한 변화를 좇아 금융 자본이 전 세계를 흘러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빠져 나온 자본은 은행가와 변호사, 회계사 집단과 조세 피난처의 활약으로 유럽과 미국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아프리카의 문제로만 볼 뿐 이를 가능하게 하는 그 이면의 시스템 자체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저자는 범죄자들이 암약하고 있는 지하 세계와 금융 엘리트들, 외교 및 정보 기득권 세력과 다국적 기업들이 역외 체제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고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2012년 4월 4일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영국 내 최대 온라인 소매점인 아마존 영국 법인이 지난 3년간 76억 파운드(약 8조5,600억원 가량)의 매출을 올리고도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법인의 본사가 룩셈부르크에 있다는 이유로 매출에 대한 세금이 룩셈부르크 당국에 납부된 것이다. 아마존은 종업원 수가 134명인 룩셈부르크 법인이 65억 파운드의 매출을 올린 반면, 2,265명이 일하는 영국 법인은 총매출이 1억4,700만 파운드에 그친 것으로 신고했다. 만약 영국에서 세금을 냈다면 그 액수는 1억 파운드에 달했을 것이다.
다국적 기업이나 슈퍼리치들이 이 같은 절세와 탈세, 거래 조작 등의 마법을 부리는 주 무대는 조세 피난처다. 아마존에 위와 같은 기회를 제공한 룩셈부르크는 조세 피난처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대표적인 국가다. 역외 시장은 한때 마약과 도박 등 조직범죄와 관련된 자금이 은밀히 거래되는 시장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마존과 같은 세계적인 지명도를 가진 기업도 공개적으로 조세 피난처를 이용할 정도로 역외 시장을 거치는 자금운용 방법은 보편화되었다. 이 같은 사례가 외국의 얘기만은 아니다.
국내 자산 순위 30대 그룹도 해외 조세 피난처에 167개 법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역외 시장으로 자금을 돌리는 것을 단순히 기업들의 '절세' 전략으로만 봐야 할까? 아마존의 사례에서만 보더라도, 룩셈부르크는 세수가 증대되고 아마존은 납세액이 준 반면, 영국 세무 당국은 1억 파운드의 세수를 놓친 셈이다. 아마존은 룩셈부르크 법인보다 17배 많은 인원이 영국 법인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매출은 룩셈부르크에서 발생된 것으로 처리하고 영국 법인에서는 택배 발송 등 주문 처리를 위한 작업만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영국 정부가 국가를 운영하며 투입해야 할 비용측면에서 생각하면, 영국 정부가 놓친 1억 파운드의 세금은 영국 납세자들이 대신 충당하게 되는 셈이다.
조세 피난처는 조세 정의의 왜곡에만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 안에서의 불평등한 부의 이전, 나아가 국제적으로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격차를 발생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조세 피난처에서 이루어지는 역외 거래가 현대금융과 글로벌 부의 이동에서 핵심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책 '보물섬: 절세에서 조세 피난처 탄생까지, 현대 금융 자본 100년 이면사'는 역외 거래의 주 무대인 조세 피난처의 실체를 한눈에 조망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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