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발레는 아주 어린 나이에 만나 결혼한 남편 같은 존재입니다. 온 힘을 다해 섬겼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26년 최선을 다해 섬겼으니 이제 보내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토슈즈를 벗고 지난 20여년 발레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발레리나는 자신의 '인생 1막'을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유니버설발레단(UBC) 수석무용수 발레리나 강예나(38·사진)가 다음달 6~13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르는 '오네긴'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다.
지난 24일 서울 광진구 능동에 자리한 UBC 연습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상적인 신체조건과 서구적인 마스크, 타고난 근성까지 더해 스타 발레리나로 살아온 베테랑 무용수는 지나온 시간을 곱씹으며 때때로 두 눈가가 촉촉해지기도 했다.
몽상가 어린 소녀
재주 예(藝), 집 나(那). 일찍이 그의 이름에서부터 예술혼이 싹트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유난히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 내성적 소녀였던 그는 "또래 아이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는 게 철없다고 생각했을 만큼 유년 시절 나는 애어른이었다"고 표현했다. 세계 명작동화를 읽고 혼자 사색하며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는 그는 유년 시절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고 했다. 몽상에 빠지는 게 좋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자신이 조금은 버거웠단다.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지만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도 저도 아닌 무료한 시간이 계속될 때 운명처럼 발레가 다가왔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을 겁니다. UBC의 '코펠리아' 공연실황을 보게 됐죠.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길로 어머니께 발레를 하겠다고 졸라댔죠.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에 발레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김인희 선생님(현 서울발레시어터 단장)이 운영하던 학원에서 발레 첫걸음을 뗐습니다. 신체조건이 좋다고 호평을 하셔도 당시 어머니는 반신반의했던 것 같아요. 4개월 속성으로 배우고 선화예술중학교에 당당히 수석 입학을 하니 그제서야 재능을 인정하시더군요."
좌절, 눈물의 기도
남들보다 비교적 늦게 토슈즈를 신었지만 시간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타고난 외적 조건과 악바리 근성 덕에 그의 발레 인생은 장애물 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듯했다. 늘 그의 이력에는 최초·최연소 타이틀이 함께했다. UBC 최연소 수석무용수가 됐고 러시아 키로프-마린스키 발레단,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에 한국인 최초로 입단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그의 질주에 예기치 않은 제동이 걸리고 만다.
1998년 ABT에 입단하자마자 '돈키호테'라는 작품에서 여주인공의 가장 친한 친구인 플라워 걸(flower girl) 역을 맡게 됐다. 그러나 연습 도중 점프 동작의 실수로 왼쪽 무릎 근육이 찢어지고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 "넘어지고 눈을 한참 동안 뜨지 못했어요. 아니 뜨고 싶지 않았죠. '3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듯했지만 그는 주춤하지 않았다. 흐트러진 블록을 다시금 차곡차곡 쌓아 올려 나갔다. "좋은 생각, 다시 무대로 돌아오는 상상을 많이 했어요. 어머니가 오시려고 해도 '그럴 돈이 있으면 차라리 치료비에 보태달라'고 매몰차게 말하며 혼자서 재활치료에 매달렸죠. 부상 후 10개월 즈음에 무대로 돌아왔습니다. 2년 정도 몸이 아픈 상태에서 무대에 계속 올랐고 5년째 되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되더군요. 부상으로 놓쳤던'돈키호테' 플라워 걸 역을 5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나 다시 맡게 됐죠. 당시 어머니가 처음으로 뉴욕에 오셔 ABT 공연실황을 보셨어요. 공연 전날 어머니와 근처 교회에 들러 오랜 시간 기도 드렸죠.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26년 발레 인생 마침표, 디자이너로 새 여정
강예나는 "내가 발레리나로서 너무 행복했으면 지금의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고 말한다. 모자란 부분, 슬픈 구석이 있어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말이다. "고독과 외로움ㆍ결핍이 힘이 됐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의 능력 내에서 늘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를 괴롭혔다. 적당히 누리는 삶에서 오는 죄책감이 자신을 더 옥죄었다고 한다. 치열하게 살았기에 오늘날 '스타 발레리나 강예나'도 있었다. 쉼 없이 내달렸던 인생 1막에 마침표를 찍고 그는 다시금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려고 한다.
"은퇴를 마음먹고 준비해온 지난 1년반의 시간은 마치 시한부 인생 같았습니다. 발레리나 강예나가 조금씩 소멸해나가는 느낌이었죠. 그러나 갑작스런 사고나 부상으로 마음의 준비가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20여년의 발레 인생을 찬찬히 정리하고 곱씹으며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게 더없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대를 떠나는 강예나는 자신의 이름을 딴 무용복 브랜드 '예나라인'을 만들어 디자이너 겸 사업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무용수는 무대의상보다 무용복을 입는 시간이 많아요. 그야말로 '제2의 피부'와도 같은 거죠. 반복되는 일상에 작은 차이가 큰 기쁨을 주기도 하잖아요. 예쁘고 잘 맞는 무용복을 입으면 연습까지 더 잘 되지만 반대가 되면 연습 자체가 힘들어지죠. 후배들한테 몸에 맞는 무용복을 선사해서 소소한 행복감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갑작스레 디자이너로서 꿈을 키운 데는 언니의 조언이 한몫을 했다. 은퇴 얘기가 나오고 앞으로 뭘 하면서 먹고사는가 고민하던 때, 언니가 어렸을 때부터 빛을 발했던 그의 미술적 재능과 번뜩이는 상상력을 언급하며 힘을 북돋웠다.
강예나는 '예나라인'의 무용복 콘셉트에 대해 "기존 통념을 뛰어넘는 과감함"이라고 말했다. "호피 무늬 원단과 반짝이 소재 등 기존 무용복 스타일을 넘어 무대의상과 연습복의 중간 지점을 파고들겠다"고 했다. 사업가로서의 꿈도 원대하고 구체적이다. 현재는 별도의 공간 없이 집에서 손수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구조지만 후에 자리를 잡으면 3년에 한 번꼴로 축제 형식의 의상 패션쇼를 열겠다는 포부도 있다.
꿈꾸는 일의 규모는 크지만 '인생 2막'을 시작하는 그의 발걸음은 좀 더 활기 있고 가벼워 보였다. 새 여정을 시작하는 그에게 '자신에게 건네는 짧은 한 마디'를 부탁했다.
"예나야, 그간 치열하게 살았다. 혹 해결 안 된 상처가 있다면 빨리 아물고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제2의 인생을 시작했으면 좋겠다. 좀 덜 치열하게 살더라도 행복하게 살자. 발레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이보다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큰 풍경 안에서 '인간 강예나'로 더 풍성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 고별무대 '오네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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