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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갈 때 잘 버리는 포기의 경영 전략

컴퓨터 하드웨어 산업과 IBM은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다. IBM은 이 산업이 등장했을 때부터 시장을 장악해 거의 모든 PC 표준을 자사의 것으로 채택하게 했다. 오죽하면 IBM 호환 기종(IBM-compatible)이라는 단어까지 생겼을 정도다. 아직도 현대 퍼스널 컴퓨터 하드웨어의 거의 모든 표준이 IBM의 것을 따르고 있다.


이렇게 하드웨어 시장을 호령하던 IBM도 1990년대 중반 들어 델, 컴팩, 삼성, 소니, 도시바 같은 기업들과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매출이 감소하더니 뒤이어 하드웨어 사업부가 적자로 전환하는 등 시간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다.

2004년 IBM은 싱크패드 Thinkpad 브랜드를 사용하던 PC 하드웨어 사업부를 중국의 레노버 Lenovo 에 매각하면서 시장에서 철수했다. 씽크패드 매각대금으론 세계 최대 회계법인 PwC의 컨설팅 사업부를 인수해 시장관계자들을 의아하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과 IBM은 하드웨어 회사에서 소프트웨어 회사로 성공적인 변신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IBM의 변화가 어느 한순간에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로터스 1-2-3’이라는, 엑셀 프로그램의 전신쯤 되는 프로그램을 만들던 로터스 Lotus 사를 1995년 인수하면서부터 IBM은 서서히 소프트웨어 기업으로의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회사의 정체성을 바꿔나가던 IBM은 2002년 뉴욕 증권거래소 업종 분류에서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섹터가 바뀌면서 새로운 시작을 공식화했다. 이후 소프트웨어 기업으로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IBM은 세계 경제가 어려운 최근에도 지난해 무려 120억 달러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금융위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영업이익이 증가한 결과였다.

IBM의 사례가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니다. 세계 여러 산업군에서 오랫동안 이름을 알려온 다국적기업들을 살펴보면, ‘변신의 역사’를 줄곧 거쳐 왔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한 기업들에겐 빈번한 일이었다. 1878년 설립된 GE나 1802년 창업한 뒤퐁Dupont 의 사례가 좋은 예이다.

GE는 발명가 에디슨의 연구소에서 출발한 전자기기 제조업체였으며, 뒤퐁은 화약을 만드는 조그마한 공장에서 시작한 화학 기업이었다. 이 두 기업은 현재 다양한 업종을 영위하는 수십 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우리나라였다면 문어발 기업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 두 기업은 해마다 상당수의 자회사를 매각하고, 또 그만큼의 다른 회사들을 사들이고 있다. 일견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매각한 회사와 매입한 회사들을 정리해 보면 일정한 추세를 읽을 수 있다. 한창 잘나가는 자회사들은 매각하고, 작고 별 볼 일 없는 회사들은 매입하는 패턴이다.

이런 거래가 있은 지 10년쯤 지나고 나면 재밌는 현상이 발견된다. 매각한 기업과 매입한 기업의 기업 가치가 역전되는 현상이다. GE나 뒤퐁에서 팔아버린 당시 잘나가던 기업들은 매각 몇 년 후 정점에 올랐다가 이후 점점 쪼그라드는 모습을 보였다. 반대로 이들이 매입한 기업들은 성장을 거듭해 그룹의 주력사나 캐시카우로 성장했다.

GE는 이런 과정을 통해 오늘날 전자기기 제조사가 아니라 헬스케어 기업으로 분류될 정도로 성공적인 업종 변신을 할 수 있었다. 뒤퐁도 화학회사와 섬유회사를 거쳐 바이오 및 에너지 기업으로 대변신을 했다. 산업의 변화를 읽고 미래 시장을 예측해 그것에 맞게 성공적으로 변신한 이들 기업은 현재 다국적 공룡 기업으로 굳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는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여러 기업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이야기가 꼭 맞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우물을 팠던 기업들은 환경의 변화에 더 심하게 부침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해운업 한우물만 판 STX그룹, 건설업에 올인한 쌍용이 좋은 예이다. 이들 기업의 사례가 근거가 되어 요즘 학계에선 사업 포트폴리오가 다양해야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변신에 성공한 기업이 있다. OB맥주와 코닥칼라, 종가집김치 등의 계열사를 매각하고 중공업회사로 탈바꿈한 두산그룹이 대표적인 사례다. 두산그룹은 한국중공업(두산중공업)과 대우 종합기계(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해 그룹의 신성장동력으로 활용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건설중장비 제조사 밥캣을 인수했을 땐 세계가 깜짝 놀라기도 했다. 오늘날의 두산그룹은 20년 전의 두산그룹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20년 전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했다면 두산그룹은 10대 그룹은커녕 30대 그룹에도 끼지 못했을 것이다.

해외나 국내를 막론하고 변신에 성공한 기업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놀랍게도 잘나가는 주력 업종을 버렸다는 점이다. 한때 세계 필름시장을 장악했던 코닥 Kodak과 후지 Fuji 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필름시장이 활황일 때 필름 사업부를 버리지 못했던 코닥은 2011년 파산했지만, 박차고 나왔던 후지는 지금도 성장 가도를 달리고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업종이 잘나갈 때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값을 받기 위해서다. 내리막길에 들어서면 찾는 곳도 없고 원하는 값을 받기도 어렵다. 특히 우리나라 기업 사례들을 보면 내리막길만 남은 계열사임에도 끝까지 손에 쥐고 있다가 파산 위기에 몰린 뒤 어쩔 수 없이 매물로 내놓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안고 있을수록 손해인데도 좀처럼 손에서 내려 놓질 못한다.

회계학적 입장에서 보면 이미 발생해서 더는 회수할 수 없는 원가를 지칭하는 ‘매몰원가(Sunk Cost)’는 의사결정에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 과거 여기에 투자한 돈이 얼마인데’ 를 생각하다 보니 포기가 어렵다. 목에 칼이 들어와야 내려놓으니 그때는 이미 제값 받기가 한참 어려워진 후이다. 이쯤 되면 어쩔 수 없이 헐값에 회사를 넘길 수밖에 없다.

대우자동차가 GM에 넘어갈 당시를 회고해 보자. 1998년 금융위기 이전, 그러니까 대우그룹의 부실 문제가 대두하기 이전에 GM은 대우그룹에 ‘대우자동차에 지분투자를 할 테니 양 사가 협력하자’는 제안을 했었다. 이때는 대우그룹이 협상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대우그룹은 시간만 끌었을 뿐 협상에 별다른 진척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1998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대우그룹의 경영권이 채권단(실제로는 정부)으로 넘어가자 상황이 역전됐다. 채권단은 대우자동차의 매각이 절실했지만, GM은 급할 것이 없었다. GM은 대우자동차에 대한 관심을 잃은 것처럼 행동하며 슬그머니 발을 빼려는 모습도 보였다. 협상에서 자주 사용되는 전형적인 기술이었다. 결국 채권단은 이전에 논의된 가격의 몇 분의 일에 불과한 헐값에 대우자동차를 GM에 넘겨버렸다. 유리한 위치에 있을 때, 잘나갈 때 파는 것이 얼마나 이득인지, 또 매각 시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사례다.

앞으로의 전망이 어둡다면 잘나갈 때, 버릴 수 있을 때 아쉬워하지 말고 버려야 한다. 그래야 더 오래 더 잘 살 수 있다. 미래 사업 환경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생각해보고 이 사업이 미래에 경쟁력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과감히 버려야 한다. 지금 내가 속한 기업이 주력으로 하는 업종의 미래를 생각해보자. 이 업종을 영위해 30년, 50년, 100년 후에도 건재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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