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기술은 전자, 컴퓨터, 항공, 환경, 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연구되고 있는데 특히 의료·제약 분야에서의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신속 정확한 검사와 진단을 위한 의료 나노기술의 현재와 미래를 확인해보자.
자료제공: 지멘스 Pictures of the Future
현대사회가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다양한 만성질환이 늘고 있 다. 이에 따라 최근의 의학도 단순히 질병을 진단하는 수준으로부터 분자 형태에서 질병 특성을 파악하는 단계로 점차 세밀해지고 있다. 그만큼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을 넘어 최첨단 디지털 분자 진단 방식의 중요성도 더욱 커지고 있는 추세다.
최근 세계적인 전기전자기업 지멘스 연구팀이나노기술을 활용한 획기적인 의료기법 하나를 개발했다. 핵산, 단백질 등 나노 수준의 분자로부터 건강 관련 정보를 추출하는 기술이 그것이다.
혈액을 통한 바이오마커 진단
심장 질환자들에게는 트로 포닌(troponin)이라는 특정 단백질이 분비된다. 때문에 심장마비, 급성심근경색이 의심되는 환자는 트로포닌 수치를 측정,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이와 관련 지멘스는 최근 신속하고 정확한 트로포닌 측정이 가능한 '전기화학 카메라(electrochemical camera)'라는 개념을 선보였다.
이는 미량의 유체에서도 유의한 양의 정보를 추출할 수 있는 일종의 바이오칩으로서 CMOS 센서에 기반을 둔 해상도 제어시스템과 다양한 포수 분자(catcher molecule)를 지닌 종이 마커 등이 하나로 결합돼 있다.종이 마커를 칩 위에 놓은 뒤 칩을 리더기에 올리면 종이 마커가 환자에게서 얻은 유체와 시약에 노출된다. 이 시약은 유체 속에서 특정물질과 반응하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유체 속에 해당 물질이 함유돼 있으면 즉각 그 존재를 알 수 있다.
즉 심장마비 의심 환자가 있다면 종이 마커에 혈액과 함께 트로포닌 감지 시약을 노출시키면 된다. 만일 시약의 포수분자가 반응을 일으키면 CMOS 센서가 이를 감지해 트로포닌 존재 여부와 함유된 수치를 알려준다. 이렇게 결과를 확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수초에 불과하다.
이 시스템은 경제적으로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고가의 칩을 직접 유체에 노출시키지 않고 교환이 가능한 저렴한 종이를 이용해 진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기화학 카메라 기술은 또 당뇨병과 같은 만성 질환 치료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심장질환과 마찬가지로 당뇨병 역시 질병을 드러내는 단백질이 혈액 안에 다량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혈액을 통한 당뇨병 바이오마커(생체 표지 물질) 진단기술은 현장에서 즉시 진단이 가능해 환자가 수차례 병원을 방문할 필요가 없어 의료비 절감도 가능하다.
지멘스 연구팀의 발터 굼브레히트 박사는 "이 기술은 매우 신속하고 신뢰성이 높아 병원 진료실과 응급실에서 심장질환 등의 진단 및 치료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 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전기화학 카메라 기술이 현실 세계에 완전히 상용화되려면 아직도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상용화가 이뤄진다면 기존 질병 진단 시스템에 혁신적 변화를 불러올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에 더해 지멘스 연구팀은 체내의 인슐린 생산을 통제하는 유전자 조각에 대한 새로운 바이오마커도 발견한 상태다. 이 바이오마커를 정기적으로 검사하면 새로운 치료제는 물론 질병을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미 전기화학 카메라 기술은 100여 개에 가까운 단백질을 1분 이내에 검출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또한 새로운 분자 검사법은 그 장소가 대도시이건 도서 낙도이건 관계없이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 국가의 공공보건 체계를 공고화하는 데에도 적잖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견된다.
이에 따라 지멘스는 이런 기술들의 적용이 시작되기만 하면 활용 분야의 확산이 가속화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유체생검 카테터로 CTC 식별
그런데 부피가 1㎗도 되지 않는 전기 화학 카메라 진단기술의 구현이 가능하다면 장기 내로 삽입되는 카테터의 표면에 부착시킬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진단시스템 개발도 가능하지 않을까.
지멘스의 '유체생검( liquid biopsy) 카테터'는 바로 이러한 아이디어에서 나온 종양(암) 전용 바이오마커다. 혈중 암세포를 의미하는 순환종양세포(Circulating Tumor Cell, CTC)에 반응하는 이 카테터는 종양 치료 후 재발 위험이 있는 환자들의 조기경보장치로서 최적의 효용성을 발휘한다.
사실 트로포닌처럼 특정 질환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단백질은 혈액 안에 많이 존재하지만 CTC는 백만개의 백혈구 중 약 한 개꼴로 드물게 나타나는 종양세포다. 어떤 CTC는 원발 종양에서 떨어져 혈류를 타고 이동, 별도의 전이 군체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 같은 특성으로 인해 CTC는 오늘날 종양 학계의 집중적 조명을 받고 있다.
지멘스 헬스케어 사업개발 부문 카스텐 힐타우스키 박사는 "CTC는 많은 종양 바이오마커 중의 하나일지 모르지만 CTC를 통해 종양의 정체를 한층 쉽게 파악할 수 있어 잠재성이 크다"며 "이는 간단히 말해 단백질과 같은 분자가 아닌 종양세포 전체를 상대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유체생검 카테터 역시 전기화학 카메라에 사용되는 종이 마커처럼 독특한 표면 코팅이 되어있어 대다수 종양세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수 포수분자를 부착할 수 있다. 힐타우스키 박사에 따르면 이렇게 유체생검 카테터는 포수분자와 직접 접하는 모든 종양세포를 포착할 수 있으며 전립선암, 폐암 등 주요 종양 유형에 반응하는 항체를 카테터에 코팅해 검사하면 종양의 기원을 밝힐 수도 있다.
그런데 혈액을 채취해 CTC 검사를 하지 않고 왜 굳이 카테터를 이용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카테터는 마치 쾌속정을 타고 바다를 내달리며 그물을 던지는 것과 같아 이를 이용하면 체내에서 흐르는 혈류 속에서 찾고자 하는 암 세포를 포착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체생검 카테터가 완벽하게 CTC를 찾아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조차 사실상 운에 의지하는 바가 크다는 게 힐타우스키 박사의 솔직한 설명이다. 이에 지멘스의 컴퓨터단층촬영(CT) 프로그램 매니저인 올리버 헤이든 박사는 이 문제의 해결에 주력하고 있다.
그는 전이성종양의 위험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혈액을 정기적으로 채취한 뒤 그 혈액을 검출 가능한 표지가 있는 항체에 노출시키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연구를 통해 이미 항체가 CTC 또는 드물게 존재하는 세포를 효과적으로 묶는다는 점을 입증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CTC는 전체 혈액에서 추출, 여과 과정을 거친 뒤 항체에 부착된 라벨을 이용해 센서칩으로 읽게 되는데 이렇게 하면 표지된 세포가 칩의 인식 부위를 지날 때마다 '저 여기 있습니다. 저는 CTC입니다'라고 알려준다고 한다.
이처럼 전기화학 카메라나 유체생검 카테터는 머지않아 우리의 삶의 질을 바꿔놓을 수 있다. 나노 단위의 가장 작은 것들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것이다.
“월요일 아침부터 전화 드려 죄송합니다, 수사관님.” 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속 수사관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경찰에서 수사를 의뢰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에서 오늘 아침 한 노인이 서울 대치동의 자택에서 사체로 발견됐다는 말이 전해졌고 즉시 현장으로 출동했다. 84세 김 할머니의 죽음은 모든 면에서 자연사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쩐지 미심쩍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때 할머니가 쓰러져 있는 소파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셔츠는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죠?” 옆에 있는 최 박사에게 물었다. 최 박사는 그가 바로 119에 신고한 사람이며 이름은 이철수라고 했다. 아울러 검사 결과, 김 할머니의 혈액에서는 트로포닌 수치가 특별히 높게 나타났다고 말했다. 트로포닌은 심장에 무리가 가면 심장세포에서 분출되는 단백질이다. “신고 당시, 이철수는 김 할머니가 매우 숨가빠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를 볼 때 김 할머니는 뇌경색으로 쓰러졌고 호흡저하와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최 박사의 말에도 나는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철수에게 다가가 물었다. “사망자 가족이신가요?” “아닙니다. 그냥 가까운 사이입니다. 돌아가신 제 어머니 때문에 친분을 맺었는데 혼자 계시는게 안쓰러워 자주 찾아뵙고는 했습니다.” 그때 최 박사가 김 할머니의 의료기록을 살펴봐 달라며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건넸다. 기록에 의하면 김 할머니는 지난 몇 년간 심장질환 소인이 있어 건강관리를 철저히 해왔다. 이를 보니 뇌경색으로 사망했다고는 더욱 납득이 가지 않았다. 특히 의료기록 중 유독 관심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1년 전 할머니는 우측 안구에 인공망막을 이식 받았던 것. 운 좋게도 할머니의 시신경과 결착돼 있는 이 인공망막에는 메모리칩이 내장돼 있었고 여기에 무선접속도 가능했다. 이에 즉시 스마트폰으로 저장된 내용을 확인해보니 지난 48시간 동안 김 할머니가 본 것들이 화면에 펼쳐졌다. 화면 속에는 사고 전날 저녁 이철수가 작은 선물상자를 들고 김 할머니를 방문한 모습도 있었다. 이철수는 상자 속의 스카프를 할머니의 목에 둘러주고 이내 집을 떠났다. 그 후 할머니는 소파에서 잠이 들었는데 오늘 아침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나는 소파에 쓰러져 있는 김 할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할머니는 화사한 분홍빛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나는 스카프를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스마트폰에 탑재된 흡입기 노즐을 빼내 할머니의 살갗에 닿은 스카프 표면을 훑었다. 이 스마트폰 속에는 나노크기의 특수물질이 내장돼 있고 특수물질 속 다수의 포수분자들은 스카프 표면의 나노입자를 탐지할 수 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스마트폰은 스카프에서 높은 수치의 펜타닐이 검출됐음을 알려줬다. 펜타닐은 강력한 마취제다. 이를 흡입하면 체내에 이산화탄소가 축적돼 숨이 가빠지는, 마치 뇌경색과 같은 증상을 띄게 된다. 모든 경위를 짐작한 나는 곧 이철수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
박소란 기자 psr@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