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키 큰 남성의 경우 가방끈이 더 길고, 월급을 더 받으며, 승진에서도 혜택을 받는다는 속설까지 나돌고 있다. 이 때문에 '키는 권력이다'라는 책까지 나왔을 정도.
우리나라도 최근 180cm가 안 되면 패배자라는 어느 여대생의 말 때문에 한동안 논란을 빚었다. 키는 결코 인간의 가치를 담보하지 않지만 키가 크고 싶은 것은 본능이기도 하다. 왜 사람들은 큰 키를 가지고 싶어 하며, 키가 작으면 패배자라는 생각을 할까.
키를 둘러싼 사회학적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 다. 그리고 이 같은 논란의 핵심은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보다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되는 키의 프리미엄이다. 물론 이를 뒤집으면 키 작은 사람이 받게 되는 사회적 차별에 포커스가 맞춰진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니콜라 에르팽은 저서 '키는 권력이다'를 통해 키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했다. 스웨덴,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프랑스 같은 선진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이 분석은 키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이 어느 정도 심각한지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에 따르면 이들 국가 사람들은 키 큰 남성이 키 작은 남성보다 사회적으로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가방끈이 더 길고, 월급을 더 받으며, 승진에서도 혜택을 받는다는 것. 한마디로 큰 키는 일종의 권력이 될 수 있지만 작은 키는 차별의 요인이 된다는 것.
에르팽은 수많은 소수자 그룹이 존재하는 요즘 키에 대한 차별 역시 남녀차별·종교차별·인종차별처럼 사회의 중심의제가 돼야 하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 키 작은 남성의 결집과 단결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하지만 이는 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크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하게 되는 계기도 됐다.
이 같은 상황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지난해 11월 KBS 오락 프로그램인 '미녀들의 수다'에서 일어난 루저(loser) 논란이 바로 그것. 당시 홍익대학교에 재학 중인 이 모 씨는 "신장이 180cm 이하인 남자들은 모두 루저"라는 발언을 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전적 의미로 루저는 '패배자' 정도를 뜻한다. 하지만 영어 문화권에서 그 말이 갖는 뉘앙스는 다르다. '철저히 실패해 재기의 여지가 없고, 살 가치도 없는 완벽한 인생의 패배자'를 말하기 때문이다.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제리 맥과이어'에서 주인공이 여자친구로부터 루저라는 욕을 듣자 격분, 그녀를 구타하는 장면이 나온다. 서구에서 여성을 구타하는 것은 대단히 비신사적이고 몰상식한 행위로 여겨지는 점을 감안하면 루저라는 말이 얼마나 심한 욕설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미녀들의 수다는 녹화로 제작되는 방송이다. 따라서 이 말을 걸러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은 이 씨의 발언을 그대로 전파에 실었다. 그리고 이는 전국적으로 엄청난 반발을 몰고 왔다. 키라는 외적 조건이 인간의 우열과 성패를 좌우한다는 말을 방송, 그것도 공영방송에서 내보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의 원인을 놓고 한동안 이런저런 논란이 많았다. 일각에서는 우리사회에 팽배한 외모 지상주의를 원인으로 들기도 했다. 물론 이 씨가 보여준, 즉 외모만을 가지고 한 인간의 모든 가치를 판가름해 버리는 사고방식은 상당한 윤리적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상식으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과연 무엇 때문에 일부 여성들이 그토록 남성의 키, 그것도 평균을 넘는 큰 키에 집착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 것도 사실이다.
역사와 문화 속의 큰 키 선호
사람들이 큰 키를 선호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현대의 일부 여성뿐 아니라 인간은 오래 전부터 외모의 여러 요소 중 키에 상당한 집착을 보였다는 것이다.
지금도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기 연예인들은 일반인보다 키가 크다. 한 나라의 국력과 무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군 의장대도 하나같이 평균 신장을 훌쩍 뛰어넘는 장신의 소유자들로 구성된다.
신화나 전설, 그리고 고대소설의 주인공 역시 일반인의 평균 키를 뛰어넘는 장대한 기골의 소유자로 묘사된다. 물론 주인공의 키를 정확한 수치로 나타낸 사례는 드물다. '거인', '장사', '늠름한 체격' 등의 문학적 표현이 주류를 이룬 것.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국제공인 도량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척', '큐빗', '에레' 등의 도량형으로 구체적 접근을 시도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당시의 도량형으로 키가 표기된 사람들의 신장을 현재의 도량형으로 환산해 보면 상당히 키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관우 운장의 키는 9척이다. 당시 1척이 20여cm 정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단순 계산해도 2m 내외의 거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다윗과 결투를 벌인 거인 골리앗의 키는 무려 여섯 큐빗 한 뼘. 미터법으로 3m에 육박한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키도 4에레에 달하는데, 이를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2m가 넘는다. 물론 이는 신화인 만큼 다소의 과장이 섞여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기네스북에 등재된 가장 키 큰 사람의 신장 은 272cm다. 신화, 전설 등에서 묘사된 키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수치는 아니라는 얘기다. 재미있는 것은 화석 발굴을 통해 선사시대 사람, 더 나아가 과거 인류의 정확한 키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모두 이들의 키가 현생인류보다 훨씬 컸다고 믿었다는 것.
지난 1718년 프랑스 금석학 아카데미의 과학자 앙리 옹은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키가 각각 40m, 38m에 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아담과 이브 이후 노아의 키는 33m로 줄어드는 등 점차 키가 작아져 현대와 같은 2m 미만이 됐다고 밝혔다.
이 같은 주장은 서기 1세기에도 있었다. 고대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는 인간의 키가 꾸준히 작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선사시대 인류의 화석이 발견되면서 이 같은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얘기란 게 밝혀졌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을 낳게 한 이면의 사고방식은 대체 무엇일까.
거의 모든 민족의 신화나 전설에는 신격화되거나 악마화된 거인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 거인이 인류 탄생을 도왔거나 아니면 인류가 이들 거인을 쳐부수고 지금의 문명을 이루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런데 이 같은 거인신화는 키에 대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큰 것을 중시하는 반면 작은 것은 천시한다. 큰 키에 우람한 체격을 갖춘 사람을 보면 완력과 권위도 상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그리고 이는 운동하는 물체의 힘은 물체의 질량에 비례한다는 스포츠 과학에 비추어 볼 때 상당 부분 사실이기도 하다.
특히 문명시대 이전, 즉 신체적 능력이 생존에 큰 영향을 미치던 시기에는 키가 크고 체격이 우람하다는 자체가 높은 생존확률 및 강한 생활력을 의미했다. 게다가 키라는 요소는 개인이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다. 이 때문에 큰 키와 우람한 체격에는 일종의 초월적이고 신비적이기까지 한 이미지가 덧씌워지게 됐다. 역사와 문화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큰 키 선호에는 이 같은 배경이 숨어있는 것이다.
진화적인 관점에서 본 키
사람들이 큰 키를 선호하게 된 것은 진화적 관점에서도 해석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영장류는 수컷이 암컷보다 훨씬 키가 크고 덩치도 좋다. 진화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암컷의 수컷 선택 전략에 따른 결과로 볼 수 있다.
큰 키와 덩치는 그에 걸맞는 완력, 더 나가서는 생활력과 경쟁력을 어느 정도 보장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요소는 짝짓기를 할 수컷을 고르는 암컷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고려 요소다.
실제 수컷의 힘이 세야 자신과 태어날 새끼를 잘 지켜줄 수 있다. 그리고 수컷의 키와 덩치가 커야 그만큼 우량한 새끼를 낳을 확률이 높아진다. 새끼의 키와 덩치가 크면 새끼 역시 생존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확률이 높아진다.
또한 키와 덩치가 크면 다른 수컷과의 교미 경쟁에서 승리를 거둘 확률도 높아진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영장류에서는 이처럼 큰 키와 덩치의 수컷들이 교미 경쟁에서 승리, 자신의 유전자를 전파함으로써 암컷보다 현저히 커지게 됐다는 게 과학자들의 견해다.
인간은 진화를 거듭하고 문명을 발전시킬수록 체격을 늘려나갔다. 초기 인류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신장은 수컷이 130cm, 암컷이 110cm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하지만 현대인의 신장은 한국인조차 남성 173cm, 여성 161cm에 달한다.
진화 및 문명발전 과정에서 체격이 커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하지만 영양 상태를 원인으로 꼽는 설이 최근 각광을 받고 있다. 인간이 화식(火食)을 하고, 요리를 하면서 식재료의 영양소를 더욱 효율적으로 섭취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채집경제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다양한 음식물을 섭취할 수 있게 된 것도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어머니들이 자식들에게 식사법을 가르칠 때 흔히 쓰는 말인 '골고루 많이많이'가 현실화된 것이다. 이렇게 획득한 영양은 고스란히 체격의 증대는 물론 두뇌 용량의 확대로 이어져 진화와 문명발전의 가속화에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진화적 경험은 인간의 무의식과 본능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키가 큰 사람은 단순히 힘만 셀 뿐 아니라 그만큼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랐으며, 진화적으로도 발달된 사람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인간의 무의식 한 구석에 뿌리 깊게 자리했을 것이다.
키 늘리기 위한 민간요법
선호의 대상이 되는 큰 키를 갖기 위해 사람들은 인위적으로라도 상당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당장 주위를 둘러봐도 키를 키울 수 있다는 각종 민간요법들이 난무하고 있다.
키를 커 보이게 하는 신발이나 옷 따위는 이미 고전에 속한다. 키를 크게 하는 식습관, 키를 크게 하는 가구, 그리고 키를 크게 하는 각종 운동법이 광고지면을 메우고 있다. 바르면 키가 커진다는 크림이나 화장품도 등장하고 있다. 심지어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사람의 몸을 잡아당겨 키를 커지게 할 수 있다는 기계도 나온 바 있다.
이 모든 요법은 소비자들에게 나름대로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자사의 제품을 사용, 키를 늘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2가지 측면에서 봤을 때 이들 요법 대부분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사기일 가능성이 크다.
우선 현대인의 키는 이미 자연 상태에서 허용하는 최고점에 근접했을 공산이 크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영양에 있다.
현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 먹을 것이 풍부하며, 뛰어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물론 일부 극빈 국가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다. 하지만 영양의 과잉섭취로 비대해진 선진국 국민의 수 역시 그들 못지않다. 그리고 이들 선진국 국민들의 평균 신장은 극빈 국가 사람들의 평균 신장을 한참 웃돈다.
영양이 차고 넘쳐 결국 '옆으로 퍼지게' 됐다는 것은 자연 상태에서 허용하는 키를 완전히 채우고도 남는 영양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키를 더욱 늘릴 수 있는 여지가 적을 수밖에 없다.
또한 민간요법 대부분은 광고와 달리 과학적이고 엄밀한 검증을 통해 효능이 입증되지 않은 게 태반이다. 어떤 요법이 키를 늘이는 것에 효과가 있다고 하는 가설이 있다면 그 가설이 왜 유효한지 검증돼야 한다. 철저한 실측, 실험, 그리고 분석을 통해 속속들이 파헤쳐 하나라도 미심쩍거나 맞 지 않는 부분이 없어야 가설을 진리로 인정해 주는 게 바로 과학적 검증이라는 얘기다.
이 같은 과학적 검증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 돈, 그리고 권위와 실력을 갖춘 연구자들의 분석 및 판단이 따라야 한다. 미 식품의약국(FDA) 인증이라는 것도 결국은 식품과 의약품의 효과 및 안전성을 입증하기 위한 과학적 검증의 하나다.
그런데 키를 크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요법 중에는 이 같은 검증을 거친 게 거의 없다. 해당업체도 그 같은 검증을 실시할 수 없을 만큼 영세한 곳이 대부분이다. 만일 검증을 받은 요법이라면 광고지면에 조그맣게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네이처'나 '사이언스' 같은 유명 과학 잡지에 소개됐을 것이다.
과학적 검증을 거친 방법
그렇다고 해서 과학적 검증을 거친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지난 1950년대 초반 구(舊)소련의 외과의사 일리자로프가 개발한, 사람의 팔 다리를 늘이는 외과술이 바로 그것.
그는 자신이 만든 장치로 사람의 뼈를 붙들고, 피질골에 흠집을 내서 뼈를 위아래로 잡아 늘이는 방법을 이용했다. 뼈는 피질골·해면골·골막·골내막 등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피질골은 가장 외부에 있는 것으로 조밀하고 단단한 게 특징이다.
이 같은 방법을 이용하면 뼈는 상실된 조직을 원상복구하는 골화과정을 통해 빈 틈새를 메우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루 1mm씩, 총 10cm까지도 키를 늘일 수 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키뿐만 아니라 체격을 늘리는 방법도 있다. 지난 1982년 워싱턴 대학의 리처드 팰미터와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랠프 브린스터 연구팀은 막 수정된 생쥐 수정란에 훨씬 큰 쥐의 성장 호르몬 유전자를 주입시켜 거대한 새끼 생쥐를 얻어냈다. 물론 이것은 동물실험이고, 게다가 배아단계에 실시된 것이어서 이 방법을 인간에게 적용했다가는 어떤 부작용이 벌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전인 1979년 과학자들은 인간의 성장 호르몬을 생산하도록 대장균을 유전자 조작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생산된 생합성 성장 호르몬은 키를 크게 하고, 심지어는 노화를 방지하는 영약으로까지 추앙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이들 방법은 키가 커지고 싶다는 미용 목적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개발된 것이 아니다. 왜소증이나 사고, 기형 등으로 키가 너무 작거나 팔다리의 길이조차 맞지 않는 사람들의 재활과 치료를 위해 개발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 방법은 가격이 비쌀 뿐더러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키는 인간가치 담보하지 않아
일부에서는 현대인을 가리켜 '21세기의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홍적세인(人)'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그 기술로 이루고픈 욕망은 원시시대와 다름없는 상태를 꼬집은 말이다. 홍적세란 200만 년 전에 시작돼 1만 년 전까지 지속된 지질시대를 이르는 용어.
키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키가 커지고 싶다는 욕망이 간절하다고 해서 인간의 가치를 키로 평가하는 사고방식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발달한 인류의 기술과 문명은 키가 크지 않은 사람도 얼마든지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세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키와 같은 외부적, 유전적 요소만으로 인간의 가치를 따지는 것은 대단히 비합리적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청산돼야 할 인종주의적 사고와도 맥이 닿아있는 위험한 발상이다.
인간은 기술문명으로 키가 작아도 편히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 기술문명을 사용해 다시 자신의 키를 키우려 하고 있다. 왠지 과학과 원시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생각도 든다.
글_이동훈 과학 칼럼니스트 enit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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