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문과계열로만 나왔다면 루트(√), 파이(π), 시그마(Σ) 등의 기호가 섞인 수학식만 봐도 울렁증이 생길 정도다.
이처럼 학생들과 일반인들에게 수학은 대개 어려운 과목이자 재미없는 과목으로 인식되어 있다. 수학을 잘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지만 수학이 재미있다는 사람은 만나기 힘든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서울대학교 수학교육과의 권오남 교수는 세인들은 이해하기 힘든 괴짜다. 수학이 재미있고 즐거운 학문이라 자신 있게 말한다. 현재의 신분이 그렇다 보니 하는 말이 아니다.
권 교수와 대화를 나눠보면 수학을 정말로 좋아함을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수학 얘기를 할 때면 마치 장난감 가게에 들어선 아이처럼 눈빛이 반짝인다. '권 교수+ 수학=행복²'인 것이다.
이러한 권 교수와 수학과의 인연은 수학이 산수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시절부터 시작됐다. 숫자와 부호, 등식을 처음 접했던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이 좋았고 재미있었다는 것.
권 교수는 "수학은 문제 자체는 복잡해도 답은 하나밖에 없다는 명쾌함이 체질에 맞았던 것 같다"며 "고교 1학년 때는 대학교수를 찾아가 수학 교재를 구해 읽었을 만큼 난해한 문제의 정답을 알아냈을 때의 성취감이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이렇듯 초·중·고교 시절 모두 수학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권 교수는 자신이 수학자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당시 수학은 최종 목표가 아니라 목표로 다가가기 위한 도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권 교수의 실제 목표는 수학을 잘하는 의사나 약사였다.
하지만 결국 권 교수는 이화여대 수학교육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서울대 수학과 석사, 미국 인디애나대학의 수학과 박사와 교육학 석사 학위를 연이어 취득한 뒤 모교인 이화여대를 거쳐 서울대 수학교육과 교수로 부임하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학문을 연구하고 교육자를 양성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권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이해의 과정 없이 무조건 외워야만 했던 암기과목에 발목을 잡힌 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자의반 타의반 내디딘 길이었지만 수학 사랑으로 뭉쳐있었던 권 교수의 열정과 가치가 발현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교수로 부임한 직후 대학계에 뿌리내린 한국식 주입교육의 병폐를 깨닫고 학생들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창의적 교수법을 직접 개발, 수학교육계에 혁신의 바람을 불러온 것.
권 교수는 "이화여대 부임 첫해에 집합론을 가르쳤는데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며 강의를 준비했음에도 중간고사 평균점수가 25점 정도에 불과했다"며 "열심히만 하면 학생들이 잘 따라와 줄 것으로 믿었던 상황에서 이는 충격 그 자체였다"고 회상했다.
이후 모든 학생들을 개별 면담해 가며 깨달은 결론은 교수중심의 일방향적 지식 전달과 학생들의 중압감을 가중시키는 수학교육 콘텐츠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권 교수는 "교수들도 난해한 수학문제를 풀 때면 실수와 오류, 수정의 과정을 거치지만 학생들에게는 이를 통해 얻어진 완벽한 결과물을 가르친다"며 "학생들의 입장에서 이는 수학에 지레 겁을 먹을 만큼 큰 부담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교수법을 중시하지 않았던 90년대 의 분위기 탓에 새로운 교수법을 배울 곳도, 논의할 상대도 마땅치 않았다는 것.
하지만 역시 궁하면 통했다. 지속적인 교수법 변화를 시도하던 중 미국의 한 학회에서 동일한 고민에 빠져있던 학자를 만나게 됐고 공동연구를 통해 다양한 교수법을 개발해 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학생 중심의 토의학습. 문제를 놓고 교수와 학생이 함께 토론하며 답을 찾아가는 게 핵심이다.
권 교수는 "토론을 통해 학생들 스스로 가설을 세우고 증명해 나가면서 자연스레 수학 지식이 체득되도록 하는 것이 이 교수법의 궁극적 지향점"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창의적 인재 교육을 이미 10여년 전부터 실천해오고 있는 셈이다.
이 교수법의 효과는 대단했다. 강의실에는 침묵과 중압감 대신 열의와 흥미가 채워졌고 다른 강의에서 입 한번 떼지 않던 학생들도 권 교수의 강의에서는 질문공세에 여념이 없다.
권 교수는 "예전에는 강의를 끝내면 학생들의 표정이 어두워 내 기분도 찜찜했다"며 "반면 지금은 매번 뿌듯한 마음으로 강의실을 나서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권 교수는 자신의 제자들이 미래의 수학교사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졸업 후 이들이 초·중·고교에서 창의교육을 실천한다면 장기적으로 창의인재의 육성은 물론 수학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회구조에도 근본적 변화를 꾀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실제 권 교수는 "얼마 전 고교 수학교사가 된 제자로부터 대학 때 배웠던 토론 중심의 교육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메일을 받았다"며 "이러한 얘기를 들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트리나 포올러스의 소설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오는 '세상을 꽃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는 많은 나비가 필요하다'는 글귀처럼 권 교수는 수학교육의 혁신이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제자라는 나비를 날려 보내고 있는 셈이다.
특히 권 교수에게는 이 같은 교수법의 혁신만큼이나 주변 지인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부분이 하나 더 있다. 교육자·연구자로서의 역할에 더해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실제 권 교수는 각종 수학 관련 학회를 비롯해 서울대 여교수회, 전국여교수연합회 등 시쳇말로 귀찮고 돈도 안 되는 활동에 많은 열정을 쏟고 있다. 지난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한국수학교육학회, 대한수학회, 한국 다문화교육학회 등 3개 학회에서 동시에 이사직을 맡았을 정도다.
남들은 바쁘다는 말로 사양하는 일들에 왜 이렇게 적극적인 것일까. 내심 명예욕이라도 있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권 교수는 교육과 연구, 그리고 봉사가 교수의 3대 본분이라 생각한다.
권 교수는 "교수라면 교육적 성과와 연구 업적에 더해 사회를 위한 공익적 기여도 해야 한다고 믿는다"며 "내게 있어 사회활동은 교수로서 해야 할 본업"이라고 강조했다.
이 신념에 따라 권 교수는 지금도 바쁜 시간을 쪼개가면서 대한수학회의 사업이사와 함께 2012년 서울서 개최되는 12차 국제수학 교육자대회(ICME)의 국제조직위원으로 활동하며 원활한 대회준비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권 교수는 "ICME는 전 세계 수학교육자들의 올림픽으로서 이를 유치했다는 것은 국가의 품격도 함께 올라가는 일"이라며 "힘들기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손님맞이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터뷰를 끝내며 권 교수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면 수학을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다.
권 교수는 "가장 자주 듣지만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고 전제한 뒤 이렇게 조언했다. "학생들은 문제풀이 중심으로 무조건 많은 문제를 푸는 것보다는 한 문제를 풀더라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어린이의 경우에는 인문서적처럼 수학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수학 관련 교양도서들을 접하게 해 흥미를 높여주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권오남 교수가 추천한 제6대 릴레이 인터뷰 주자는 서울대 기계공학과의 고상근 교수다. 권 교수는 "고 교수는 수년 전부터 서울대 동료 교수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리더십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며 "융합과 통섭이 강조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경쟁보다는 동료 간의 우의와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추천의 변을 밝혔다.
| 1983 이화여대 수학교육과 학사 1985 서울대 수학과 석사 1992 미국 인디애나대학 수학과 박사 1993 미국 인디애나대학 교육학 석사 1993~2003 이화여대 수학교육과 조교수,부교수 2003~현재 서울대 수학교육과 부교수, 교수 2004~2006 한국수학교육학회 총무이사, 대한수학회 이사, 한국다문화교육학회 이사 2008~현재 국제수학교육자대회 국제조직위원 |
양철승 기자 csya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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