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그때까지 세계 각국 해군의 중심 사상이었던 ‘대함거포주의’를 한 순간에 낡은 독트린으로 만들어 버린 날이었다.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으로 몰고 간 일본 해군의 진주만 공습은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된 태평양 전쟁의 아이콘과 같은 사건이었다.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두 바다로 둘러싸여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절대 안전할 것만 같았던 미국의 본토가 외국 군대, 그것도 유럽의 선진국들보다 한세대 뒤처진 국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던 일본의 공격으로 초토화됐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은 ‘지상에서 영원으로’, ‘도라! 도라! 도라!’, ‘진주만’ 등의 영화로도 여러 차례 극화됐고, 진주만 공습 유도설 등 각종 음모론도 나오게 됐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미국이라는 ‘잠자는 사자’의 콧수염을 건드린 일본의 만용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진주만 공습. 과연 어떻게 벌어졌고, 어떤 파장을 남겼을까. 또한 말 많고 탈 많은 진주만 음모론은 과연 사실일까.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배경
미국과 영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일본이라는 아시아의 신흥 제국주의 국가가 진주만 공습 훨씬 이전부터 아시아 태평양의 이권을 놓고 경쟁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1905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미국은 필리핀, 일본은 조선의 영유권 확보를 인정하는 미일 양국의 비밀조약) 등을 통해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이권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급속한 산업화와 자본주의화에 따른 부산물인 부(富)의 불균등한 분배,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종결로 인한 경기침체, 게다가 제국주의 자체의 팽창주의적 속성 등으로 인해 일본은 날이 갈수록 ‘더 큰 밥그릇’을 요구하게 됐다.
이 같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이 바로 1929년의 미국 발(發) 세계 경제 대공황이었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의 미국은 가히 ‘세계의 공장’이라고 할 만큼 전 세계를 상대로 원자재 및 공산품을 거래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 발 대공황은 마치 도미노처럼 전 세계 각국에 영향을 미쳤다.
선진 제국주의 국가에 비해 비교적 작은 영토와 부족한 자원, 그리고 모자라는 국력을 가지고 있던 일본이 입을 경제적 타격은 그만큼 더 클 수밖에 없었던 것.
군국주의 성향의 일본 정부는 외국을 침략,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하는 방식으로 이 같은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 결과 터진 것이 1931년 9월 18일에 벌어진 일본군의 만주 침공 사건인 만주사변이었다. 일본은 만주에 만주국이라는 새 국가를 수립하지만 만주국은 철저히 일본의 이권을 수호하기 위해 운영되는 괴뢰 국가에 불과했다.
국제사회는 중국 영토의 일부인 만주를 침공한 일본의 행동을 비난했다. 이에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 탈퇴, 1934년에는 일본 해군의 군비를 규제하던 워싱턴 해군조약 파기 등 초강경 노선을 견지하며 만주를 포기하지 않았다.
만주사변으로 인한 경기회복과 군수품 특수로 일본 국민들은 더욱 더 군국주의를 지지하게 됐다.
그리고 마침내는 1937년 군벌이 아닌 국민당 통제하의 중국 영토를 침공함으로서 중일전쟁이 시작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중국의 저항은 끈질겼고, 일본의 맹동을 묵과하지 못한 미국, 영국, 네덜란드의 경제 봉쇄 또한 이어졌다.
특히 미국은 자국 내 일본인 자산 동결, 대일 고철 및 석유 수출 금지 등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이 같은 경제 봉쇄로 인해 중국에서의 전쟁 수행에 곤란을 느낀 일본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전면전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서구 국가들의 간섭 없이 중국에서의 침략 전쟁을 계속하려면 일단 서구 국가들의 통제 하에 있던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자원지대 및 전략 요충지를 점령해야 했다.
즉 해당 지역의 서구 군대를 괴멸시킴으로서 이른바 ‘이익선’을 단단히 확보해야 했던 것.
그 계획에는 얼마 전 일본을 위협하기 위해 진주만으로 전진 배치된 미 태평양 함대를 괴멸시키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일본군 수뇌부는 미 태평양 함대가 괴멸할 경우 적어도 6개월, 길게는 12개월간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거칠 것 없이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일본군의 작전계획
군함은 그 소속국의 영토로 간주되는 만큼 미 해군 함대에 대한 공격은 이미 미국과의 사생결단을 각오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미국의 실력을 잘 아는 지미파 군인들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세력과의 개전을 반대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상까지도 암살해 버릴 만큼 힘이 세진 일본 내 강경파를 막을 도리는 없었다. 결국 1941년 12월 1일 일본은 어전회의에서 미국과의 개전을 결의했다.
이에 앞서 11월 18일에는 항공모함 6척과 387대의 함재기를 주력으로 하는 일본 해군의 기동부대가 이미 진주만을 향해 닻을 올렸다.
1941년 1월부터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을 맡았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미 태평양 함대와 결전을 벌일 경우 항모 탑재 항공기에 의한 기습공격이 가장 유효하고 신속한(선전포고 후 늦어도 1시간 이내에 공격이 가능할 만큼) 전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 전해인 1940년 11월 11일 영국 해군은 20대의 항공기로 이탈리아 타란토 항에 정박한 이탈리아 해군 함대를 공격, 괴멸시켰다. 이로써 한 때 국력의 상징이라고까지 평가받던 전함이 항공 공격에 무력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아시아·태평양의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계획하게 된다.
하지만 2차 대전 당시만 하더라도 아직 세계 각국의 해군에는 전함 함포의 공격력이 해전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대함거포주의가 상당 부분 남아있던 터라 야마모토 제독의 설득은 쉽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일본 해군의 진주만 기습 기동부대에는 5척의 특공잠수정이 모선인 이호 잠수함에 실려 참가했다.
이 특공잠수정은 승무원 2명, 배수량 60톤, 무장은 어뢰 2발의 초소형 잠수함으로서 본격적인 공습이 시작되기 직전 진주만 항구 내에 침투, 어뢰를 발사해 미군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미국도 일본 항모 기동부대의 출항을 알고 있었고, 주미 일본대사관에 대미 선전포고문이 암호화돼 전달된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감히’ 진주만을 직접 공격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설령 일본이 항모 기동부대를 출항시켰더라도 그 목적지는 대중 전쟁 수행에 직접 필요한, 천연자원이 있는 동남아시아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만약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게 된다면 현지인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일본계 이민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키는 방식이 가장 개연성 높다고 미국은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해독된 일본의 외교용 암호와는 달리 일본 해군의 암호는 해독되지 못했던 것도 개전 일시와 장소를 알아내려던 미군 수뇌부를 더욱 미궁으로 몰아넣었다.
어쨌든 일본의 도발 의도를 알아채기는 했기 때문에 미국은 태평양 함대의 3척 뿐인 항공모함들을 웨이크와 미드웨이 등의 최전방으로 보내 경계를 강화한다.
하지만 일본 해군이 항공기와 잠수함으로 진주만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항공모함 제외 미 함정 전멸
운명의 날인 1941년 12월 7일 오전 6시(현지시각). 하와이 오아후 섬 북방 230마일 해상에 떠 있던 일본군 항모 기동부대에서 전투기 43대, 폭격기 140대로 이루어진 1차 공격대가 진주만을 향해 출격했다.
오전 7시 55분 진주만 중앙의 포드 섬 해군 항공기지에 첫 번째 폭격이 가해졌다. 더 많은 폭탄과 어뢰들이 전함에 비 오듯 쏟아졌다.
제로 전투기와 급강하 폭격기는 오아후의 육군, 해군 항공기지를 폭격했으며 감시를 쉽게 하려고 날개 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주기시켜 놓았던 미국 비행기들을 격파했다. 진주만 근처 히캠 기지의 육군 막사에도 폭탄과 기관총탄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하고 치명적인 손실은 전함들이 격침당한 것. 포드 섬 동부에는 7척의 미군 전함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8번째 전함이자 태평양 함대의 기함인 펜실베이니아호는 해군공창 근처의 드라이독에 있었다. 84척의 다른 해군 함정들은 진주만에 정박 중이었고, 2척이 항구 입구 외곽을 순찰 중이었다.
일본 항공기에서 투하된 폭탄과 어뢰들이 미 전함들을 격파해 한 척씩 정박지에 침몰시켰다.
전함 오클라호마호는 5발의 어뢰를 맞고 옆으로 굴러 마스트를 진주만의 진흙바닥에 처박았다. 이로 인해 수 백 명의 승무원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배 안에 갇혔다.
네바다호는 저속으로 항구를 탈출하려 했지만 일본 항공기의 공격으로 치명타를 입자 침몰을 피하려고 일부러 좌초했다.
아리조나호 역시 전방 탄약고에 폭탄이 떨어지자 수 천 톤의 무게가 나가는 고성능 폭탄인 14인치 폭탄 수백 발과 장약 수천발이 일제히 대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의 섬광이 한번 번쩍이면서 한꺼번에 1,000명이 넘는 병사들이 전사했다. 아리조나호는 뒤틀리고 불타 부서지면서 진주만의 얕은 바닥에 가라앉았다.
오아후 상공에는 더 많은 일본 함재기들이 나타났다. 공격대 제2파인 37대의 제로 전투기와 132대의 급강하 폭격기, 수평 폭격기들이었다. 더 많은 배들이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마지막 일본 비행기가 항공모함으로 돌아왔을 때 진주만은 시커먼 연기로 휩싸여 있었고, 비행장 여러 곳이 파괴됐다.
미국 함대는 폭격 때 진주만에 없었던 3척의 항공모함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멸 당했으며, 2,403명이 전사하고 1,178명이 부상당했다.
일본 함대에서는 제3차 공격대를 투입해 전과를 확대하고, 다음 순위의 목표물인 도크와 연료 저장고를 파괴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2차 공격대 출격 때부터 미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임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귀중한 항모 함재기 전력에 필요 이상의 손해가 생길 것을 두려워한 기동부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제독의 명령으로 공격은 2차로 끝나고 이날 오후 2시 22분, 기동부대는 북북서로 퇴각하기에 이른다.
함께 투입됐던 특공잠수정 5척은 미군에 의해 격침당하거나 기동 불능 상태에서 자침당하는 등 모두 손실됐다.
승무원 10명은 유일하게 생존해 포로가 된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를 제외하면 모두 전사했다.
진주만 공습 개시 20분 전에 미국 측에 전달될 예정이던 일본의 대미각서(사실상의 선전포고문)는 암호 해독 지연으로 공습 개시 1시간 후에나 미국에 전달됐고, 미국은 이를 두고 비열한 기습공격이라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진주만 공습의 파장
일본은 진주만 공습에서 미군 전함 4척, 부설함 1척, 표적함 1척을 격침했다. 또한 전함 4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3척, 수상기 모함 1척, 공작함 1척을 격파했다.
이와 함께 항공기 격파 230대, 전사 및 부상 3,500여 명 등의 피해를 입힘으로서 미 태평양 함대를 괴멸시키고 진주만의 기지 기능을 마비시켰다.
이에 반해 일본군의 피해는 항공기 29대, 특공잠수정 5척, 전사 및 포로 65명에 불과했다. 타란토 항 공습보다 더욱 대단한 이 전과로 인해 전함이 더 이상 항공기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이로서 대함거포주의는 사실상 종막을 고하게 됐다.
일본은 진주만을 시작으로 싱가포르, 괌, 웨이크,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및 태평양의 자원지대 및 전략 요충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국력을 유럽 본토의 추축군과 싸우는 데 할애하고 있던 서구 국가들에게 아시아 식민지에까지 1선급 병력을 주둔시킬 여유는 없었다.
이들은 얼마 가지 않아 신속히 함락당하고 일본은 나치 독일이 최대로 확보한 영토보다도 더욱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 특히 일본 본토에 대한 해상과 공중의 위협을 모두 제거하는 데 성공함으로서 일시적으로는 목표를 달성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대일전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고, 그 이듬해 6월 미드웨이에서의 패전을 시작으로 일본은 단 한 번도 미국에게 이기지 못하고 패주만을 계속하게 된다.
그리고 끝내는 일본 본토에 원자탄까지 얻어맞고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을 끝내게 된다. “워싱턴까지 일본군을 진격시켜야 미국에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며 개전을 반대하던 지미파 장군들의 주장은 결국 옳았던 것이다.
한편 진주만 공습을 일본의 공습을 유도하기 위한 미국의 술수로 보는 음모론적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여러 주변 정황은 차치하고서라도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 해군의 태평양 함대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건조에 많은 시간과 자금이 소요되는 해군 함정의 특성상 한동안 일본 해군에 대해 압도적인 전력 우세를 확보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그 동안 태평양의 상당한 부분을 일본군에게 내줬을 정도니 말이다.
아무리 자해를 통해 적을 유인하더라도 어느 정도 수습할 수 있는 선에서 하지, 이렇게까지 위태로운 수준까지 하지는 않는 법이다.
글_이동훈 칼럼니스트 enit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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