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 이후 태평양 전쟁의 일본군, 심지어는 전후에도 일본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게 된 단어가 바로 자살공격대인 가미가제 특공대다.
구미국가에서 ‘가미가제(神風)’라는 말은 대체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무모한 짓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위험 부담이 높은 3D 사업장의 노동자를 ‘가미가제 워커’, 손님을 빨리 모시기 위해 각종 신호위반에 난폭운전, 그리고 과속도 서슴지 않는 택시를 ‘가미가제 택시’라고 부른다.
2차 세계대전 종전 6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서구인들에게 이렇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일본의 자살공격대, 즉 가미가제 특공대는 과연 어떻게 만들어진 부대며 어떤 전과를 올렸을까.
절망적인 전력 열세 속에 탄생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한때 전 태평양과 인도양을 호령하던 일본군의 명운은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였다.
일본은 19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 해군기지를 폭격하고, 미국령 필리핀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자원지대를 모조리 점령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이 같은 기세를 몰아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넘볼 정도였다.
하지만 일본 해군과 육군(당시의 일본군에는 공군 조직이 없었다)은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지상전에서의 완패로 전투력의 상당부분을 상실하게 된다. 거기다가 미국이 완전한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미국이 압도적인 물자와 병력으로 반격에 나서면서 일본군은 과달카날 전투 이래 단 한 번도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에 승리하지 못한 것.
특히 남태평양, 중부 태평양의 일본 위임 통치령 섬들이 옥쇄(전원 전사)를 각오한 일본군의 처절한 방어전에도 불구하고 차례차례 함락됐다.
1944년 6월에는 일본의 ‘절대 방어선 ’에 해당하는 마리아나 군도에 미군이 상륙했다. 미군은 8월 초 일본군의 저항을 완전히 제압하고 이 섬에 일본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B-29 전략폭격기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 10월 20일에는 필리핀에 미군이 상륙했다. 마리아나에 이어 필리핀까지 미군에게 빼앗기게 되면 동남아시아 자원지대와 일본 본토를 잇는 해상 보급로가 위협받게 돼 일본의 전쟁수행 능력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일본은 문자 그대로 사력을 다해 미군의 진격을 막아야 했지만 과달카날 전투 이후 거듭되는 패전으로 숙련 전투원이 크게 줄어들고 있었다. 특히 전투원 중에서도 선발 및 육성이 어려운 엘리트 전투 조종사의 손실은 극심했다.
연이은 패배를 거치면서 숙련 조종사의 절대 다수가 전사해 버렸고, 이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급하게 훈련시킨 신참 조종사들의 전투력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일본군은 마리아나 군도 전투에서 마지막 남은 항공모함 전력을 총집결, 6월 19일과 20일 미군과 최후의 항공모함 결전을 벌였다.
하지만 600대가 넘는 항공기가 격추당하고 패퇴했다. 또한 10월 12일부터 16일까지 미군의 필리핀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감행한 타이완 항공전에서도 불과 4일 만에 312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반면 미군의 피해는 마리아나 항공전에서 항공기 123대, 타이완 항공전에서 함정 3척 파괴 정도에 불과했다.
이렇듯 정상적인 전법으로는 전과를 거둘 수 없었던 절망적인 상황에서 일본 해군 수뇌부는 마리아나 해전 패배 직후인 1944년 7월부터 대형 폭탄을 장비한 항공기를 목표물에 직접 충돌시키는 자살공격 전법을 구상하게 된다.
즉 병사의 목숨을 소모품처럼 여기는 사고에 젖어 있던 일본 해군 수뇌부는 이른바 ‘특공전법’을 공식적으로 채택, 9월에는 각종 자폭식 특공 전용병기 제작을 개시하게 된다.
이 같은 상부의 지침을 가지고 1944년 10월 17일 필리핀의 일본 해군 제1항공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오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은 부임한지 이틀 후인 19일 자살 공격대의 정식 창설을 명령한다.
지휘관인 세키 유키오 대위를 포함, 조종사 24명으로 구성된 ‘가미가제 특공대’를 구성한 것. 부대의 이름인 가미가제는 13세기 말 두 차례의 고려·몽고 연합군의 일본침공을 격퇴한 신성한 태풍에서 따온 것이다.
이들이 최초의 전과를 거둔 것은 1944년 10월 25일 오전 10시 50분. 세키 유키오 대위가 이끄는 가미가제 특공대 예하의 ‘시키시마’ 부대 소속 제로 전투기 5대가 미 해군의 태피 3함대에 내리 꽂힌 것이다.
250kg 폭탄을 매단 이들 제로 전투기들은 1대를 제외하고 모두 미군 함정에 명중, 호위 항공모함인 세인트 로우 호를 격침시키고, 다른 미군 함정 3척에도 대대적인 피해를 입혔다. 이는 조종사 200명으로 정상적인 공격을 벌여도 얻어내기 힘든 전과였다.
이에 크게 고무돼 일본 육군 항공대도 자살공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더 나가서는 일본군 육상부대와 해상부대, 심지어는 전 국민까지 자살공격의 광풍에 몰아넣으려 했다.
가미가제 특공대의 진실
자살공격이라는, 현대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드라마틱한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이었는지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잘못된 소문이 난무하는 부대도 드물다.
가장 널리 퍼진 속설로 가미가제 항공기는 조종사가 탈출할 수 없도록 캐노피를 용접해 버리고, 돌아오지 못하도록 연료도 편도분만을 넣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조종사의 숙련도가 극히 낮아 적함을 제대로 찾아내기조차 어려웠고, 숙련된 정비병들과 기술자들이 크게 손실돼 항공기의 기체 결함 또한 속출했던 당시의 일본군 여건을 따져본다면 그렇게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 목표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기체 결함 등으로 기지에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또한 가미가제 특공대의 조종사들은 전원 지원자로 충당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이 원칙은 창설 초기부터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당장 가미가제 공격을 최초로 성공시킨 세키 유키오 대위부터가 상관의 반(半) 강제적인 지명에 의해 가미가제 특공 임무를 맡게 됐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그는 출격 직전 도메이사의 종군기자 오노다 마사시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최고의 조종사까지 희생시켜야 한다면 일본의 앞날은 어둡습니다... 저는 천황을 위해서도 조국을 위해서도 아닌 오직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 이 임무를 맡은 것입니다... 시켜만 준다면 기체를 충돌시키지 않고도 500kg 폭탄을 적 항공모함 갑판에 명중시킨 후 무사히 돌아올 자신이 있습니다.” 이 같은 발언에는 가미가제 특공대를 비판하는 뜻이 숨어있다.
심지어 전황이 점점 막장으로 치달아감에 따라 비행대 전체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가미가제 임무에 투입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렇듯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끌려간 가미가제 대원들이 모두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던 골수 군국주의자는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일본은 군의 기간요원이라고 할 수 있는 육군과 해군 사관학교 출신자는 가미가제 특공대 차출이나 지원을 가급적 불허했다. 이는 조직의 보신을 꾀하는 이중적인 행태인 것이다.
이렇게 끌려가 산화한 가미가제 대원중에는 일본군에 징집된 한국인도 포함돼 있었는데, 현재 총 11명(자료에 따라서는 16명)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중 탁경현(일본명 미츠야마 히로부미) 소위, 인재웅(마쓰이 히데오) 오장 등은 각각 일본영화 ‘호타루’와 미당 서정주의 친일 시(詩) ‘오장 마쓰이 송가’등의 대중문화를 통해 유명해졌다.
조국을 빼앗겨 남의 전쟁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이들 한국 출신 가미가제 대원들에게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자랑스런 황군”이라는 찬사도,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본군에 입대한 친일파”라는 야유도 모두 가당찮을 듯하다.
이어지는 자살행진
가미가제 작전의 대성공으로 고무된 일본 군부는 이 같은 자살공격을 전군 단위로 확대 시행한다.
해군 항공대에 이어 육군 항공대에서도 ‘진무대’라는 이름의 자살공격 비행대를 편성해 싸웠다. 특히 항공부대 뿐만 아니라 육상부대와 해상부대에도 자살공격 부대가 편성됐다.
하지만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일본이 자폭공격 전용 병기까지 생산해 자살공격을 감행했다는 점이다.
한 번 사용하면 탑승자의 생환이 절대 불가능한 이들 병기에는 1,200kg의 폭약을 싣고 시속 630km로 날아가 목표물에 충돌하는 로켓엔진 항공기 ‘요코스카 오카’가 있었다.
또한 93식 산소 어뢰를 사람이 탈 수 있게끔 개조한 인간어뢰 ‘가이텐’, 모터보트에 폭탄을 싣고 적 함정에 충돌하는 자살보트 ‘신요오’, 그리고 잠수대원이 폭탄을 메고 적함 밑바닥에 잠입해 자폭하는 ‘후쿠류’ 등도 있었다.
지상전에서도 폭탄을 든 병사가 미군 전차나 진지로 돌격해 자폭했다. 또한 적 비행장에 항공기를 착륙시킨 다음 탑승한 병사들이 활주로의 적기를 공격해 파괴하는 ‘이열 낙하산대’도 구성됐다.
필리핀 전투 말기에는 대만 원주민들로 편성한 ‘훈낙하산대’를 활용한 의호작전, ‘타카치호 강하 부대’를 이용한 테호작전 등 낙하산 특공도 있었다.
일본군의 자살공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독일제 제트전투기 Me-262, Me-163 항공기를 일본에서 생산해 자살공격에 사용하고, 병사의 몸에 세균병기를 주입시켜 죽게 되더라도 병사의 시신을 통해 적에게 질병을 옮기자는 계획까지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자살공격을 위해 끝없이 발전해 간 그들의 상상력과 창의력 앞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가미가제 특공대를 포함해 이러한 각종 자살공격 전법이 한데 모여 버라이어티 쇼(?)를 펼친 곳이 바로 1945년 4월 1일 벌어진 일본 본토의 오키나와 전투다.
지상에서는 오키나와 방위사령관 우시지마 미츠루 장군이 현지 소년소녀들까지 징집해 모은 10만명이 넘는 대군으로 상륙한 미군과 결사적인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그는 휘하 장병의 3분의 2 이상을 잃고는 자신도 할복자살했다.
하늘에서는 자그마치 1,465대에 달하는 가미가제 항공기들이 오키나와 앞바다의 미군 함대를 향해 돌격했다.
바다에서도 ‘야마토’호(만재 배수량 7만2,000톤)가 9척의 동료 함을 거느리고 해상 특공작전에 나섰다. 야마토호는 그때까지 살아 남아있던 일본 해군의 자존심, 세계 최대 규모의 전함이었다.
그러나 배를 오키나와 해안에 좌초시켜 해안포대로 사용하겠다던 그들의 작전은 미 해군 항공모함 함재기 수 백 대의 집중폭격을 받고 야마토 이하 6척의 군함이 격침되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자살공격을 포함,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맹 반격으로 미군은 전사 1만2,513명, 부상 3만8,916명, 비전투손실 3만3,096명의 엄청난 인명피해를 냈다. 이는 미국이 일본 본토 상륙전을 포기하고 원자폭탄을 사용하게끔 한 주요한 원인이 됐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일본인들의 자살행위는 멈추지 않았다. 8월 15일 오전 천황 근위사단의 일부 장교들은 천황의 항복 방송을 저지하고자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진압됐다. 쿠데타 주동자들과 이를 방조한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은 할복자살했다.
해군 제5항공함대 사령관 우가키 마토메 제독도 11대의 D4Y 스이세이 폭격기를 이끌고 바다로 나가 추락해 죽었다. 가미가제 특공대 편성을 최초로 지시한 오오니시 타키지로 제독은 자택에서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 외에도 일본 전역에서 항복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산발적인 자살 또는 연합군에 대한 자살공격 행렬이 이어졌다.
인간 존엄성 무시한 단말마
일본 육군 및 해군 항공대의 가미가제 작전으로 전사한 승무원 숫자는 총 3,912명. 미국 측 주장에 의하면 가미가제 공격으로 34척의 군함이 격침당하고 368척이 피해를 입었으며 승무원 전사 4,900명, 부상 4,800명의 피해를 입었다.
일본은 이렇게 엄청난 인원을 자살공격으로 내 몰았음에도 끝내 패망하고 말았다. 가미가제로 대표되는 자살공격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찬반양론이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떠한 국가나 정치 체제도 구성원인 ‘인간’을 무시하고는 존립할 수 없다.
물론 전쟁에서 아군의 희생자가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손실을 입었을 경우 적절한 선에서 전쟁을 종결짓고 와신상담을 노리는 것이 차라리 낫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모두 싸우다 죽어버리면 누가 그 나라를 이어갈 것인가. 전투원이 갖는 인간 존엄성을 무시하고 소모품으로 전락시켜 버린 가미가제 작전이 국가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봐도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_이동훈 칼럼리스트 enit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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