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퍼거슨은 해뜰 즈음 집을 나와 일터로 향했다. 월요일 아침이라 기분이 상쾌했다. 몇 시간 뒤 거래를 통해 2,500달러를 주머니에 챙긴 뒤 퍼거슨은 농구연습을 하러 공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공원에 도착한 지 채 5분도 안 되어 한 마약 거래상의 동생이 농구공을 달라고 하면서 언쟁이 시작됐다. 퍼거슨은 싫다고 했고 그 친구는 달라고 계속 졸랐다. 언쟁은 크고 시끄럽게 몇 분간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상대는 같은 패거리들을 몰고 다시 나타났는데 그중에 끼어 있던 형이 “어이 친구! 왜 내 동생을 우습게 보는 거지?” 라고 시비를 걸었다. 퍼거슨도 떨어져 나오면서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퍼거슨은 머리에 총알이 박힐 뻔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좀더 유화적인 어투로 말을 할 수도 있었다. 갑자기 그는 등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다시 한 번 통증을 느끼고 돌아선 그는 통증의 원인을 발견했다. 상대편 녀석의 형이 얼음 꼬챙이로 그의 등을 찔렀던 것이다. 그날 아무런 무기도 소지하지 않았던 퍼거슨은 얼음 꼬챙이를 빼앗아서 상대를 몇 번 찔렀지만 상대편 패거리 중 한 명이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퍼거슨의 얼굴을 야구공인양 배트로 후려갈겼다. 얼음 꼬챙이를 놓친 퍼거슨은 위험을 직감했다. 퍼거슨을 열일곱 차례나 찌른 뒤 사이렌 소리가 나자 상대 패거리들은 모두 흩어졌다. 구급차가 멈춰 섰다.
“난 치료 필요 없어요” 퍼거슨이 의료진에게 말했다.
“폐를 한 번 확인해 봅시다.” 한 의사가 말했다.
“피는 안 난다니까요” 퍼거슨이 대꾸했다.
“재킷 좀 벗어볼래요?”
보통 마약거래상들은 사태가 확산되어 경찰서에 불려가 진술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몸에 더운 기운이 안 느껴진 그가 천천히 재킷을 벗자 상반신이 온통 피범벅이 되어 빨갛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공기가 빠져나가는 기운을 느꼈다.
“폐가 움직이는 소리가 안 나요”라는 의사의 마지막 얘기를 들으며 그는 의식을 잃었다.
에릭 퍼거슨이 깨어난 곳은 천당도 지옥도 아니었다. 그는 공원 농구장에서 몇 블록 떨어진 메릴랜드대 알 애덤스 코울리 충격 외상센터의 한 병실에서 온갖 튜브와 삐삐거리는 의료장비에 둘러싸인 채 의식을 되찾았다. 메릴랜드나 외지 사람들 중 이곳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이곳을 잘 아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여기를 쇽 트라마(Shock Trauma)라고 부른다. 퍼거슨은 폐 두 곳이 모두 손상되고 내출혈도 있었던 자신이 어떻게 의식을 되찾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살아서 깨어났다는 사실만은 실감했다.
그날 이곳의 의사와 간호사, 기술자들은 미국 내 다른 어느 외상센터에서보다도 더 자주 행해지는 이곳만의 수술 방법으로, 마치 전위 예술을 연상시킬 정도의 최첨단 의료 기술을 이용해 퍼거슨의 폐를 치료했다.
쇽 트라마는 미국 내 최초의 외상치료 센터였다. 1989년 이곳은 자체 건물을 갖춘 최초의 외상치료센터가 되었다. 이곳은 세계 다른 어느 곳보다도 새로운 의료기술이 먼저 도입되었다. 군 의료진도 이라크에 파병되기 전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고 이곳에서 근무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의사도 많았다. 그들은 외상치료센터의 첨단기술이 사망률을 최소로 줄이는 것을 두고 이곳을 저승으로 가는 길목의 과속방지턱이라고 불렀다.
4년 전 퍼거슨은 숨줄이 거의 끊어진 채 쇽 트라마에 실려 왔었다. 그 당시 일부 학계에서는 10여 년 정도의 기간동안 살인사건 수가 대폭 줄어든 원인을 밝히려 하고 있었다. 암허스트 소재 메사추세츠 대학 범죄학자인 앤소니 해리슨은 1990년대 중반 어느 날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 컴퓨터 자료들을 뒤적이다가 쇽 트라마 의료원 환자의 생생한 모습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화면에 보이는 일종의 방사선 사진에는 환자의 두개골에 칼이 목까지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의사들이 우려한 건 환자의 소생 가능성보다는 회복 여부였다. 해리슨은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미국에서의 폭력 수위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지만 사망자 수가 줄어들었을 뿐이었다.
그 이후 몇 년 동안 이러한 경향을 검토한 그는 작년에 자신이 발견한 사실들을 <사망 연구>라는 한 학술지에 게재했다. 해리슨은 학술지를 통해 사망률이 줄어든 주된 이유가 베트남전의 결과로 많은 의사들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환자들을 치료한 경험으로 인해 외상치료수준이 급격히 향상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이후 의사들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기술의 도움으로 진단과 치료 기법을 꾸준히 실험하며 완성도를 높여왔다는 점이다. 1980년대 중반 의사들은 CT 촬영기를 사용하고 인체 조직의 3차원 영상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는 신체 전부위의 정교한 사진을 몇 초면 찍을 수 있다. 복부 부상을 보여주는 데 사용되는 초음파기는 맥주 냉동기 크기에 불과해 한 병동에서 다른 병동으로 쉽게 이동시킬 수 있다. 인공 혈액도 개발 중이며 찢어진 신체의 간에도 즉각 출혈을 멈추게 하는 특수 반창고까지 개발되고 있다.
의료분야의 발전 속도는 굉장히 빨라지고 있다. 10년 전 범죄에 희생된 사람들은 시대를 잘못 만난 셈이다. 이들이 그때의 불운을 최근에 겪고 있다면 소생했을 가능성은 훨씬 높았을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한 해리스의 통계 수치를 보면 깜짝 놀랄 만하다. 그에 따르면 응급조치와 외상치료의 발전이 없었을 경우 연간 사망 사건 수가 현재의 1만 천~2만건이 아닌 4만 5천~7만 건에 달했을 것이라고 한다. 1964년 당시 범죄의 17%가 총격사건이었고 희생자들 중 16%가 사망했다. 하지만 30여년이 지난 1999년 퍼거슨이 칼에 찔렸을 당시 19%가 총상이었지만 사망율은 5%에 불과했다.
쇽 트라마의 통계 수치는 훨씬 인상적이다. 폭력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사인에 관계없이 사망률은 10년 전 7~8%에서 현재 3%로 떨어졌다.
이곳의 의사들은 훨씬 더 정교해진 자동화 무기의 확산으로 이전에 비해 부상 정도가 훨씬 심한 중상자들을 과거보다 두 배나 더 진료하면서 이런 결과를 이루어냈다. 최근 쇽 트라마에서는 환자 7천명당 200명 꼴로 사망하는데, 10년 전만 해도 3,500명당 200명이 사망했었다. 전국 평균과 비교해 볼 때 비슷한 수준의 다른 병원들에 비해 쇽 트라마에서는 환자 100명당 소생율이 2배 이상 높다.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야구 선수의 타율처럼 사망률을 줄줄이 꿰고 있을 정도로 폭력에 찌든 도시에서는 쇽 트라마가 보여준 업적들이 정치적으로 시사하는 바도 크다. 실제로 전직 수석검사출신인 볼티모어의 시장인 마틴 오말리는 최근 본인의 재선 선거운동에서처럼 연간 살인사건 사망자 수를 300명 미만으로 끌어내리겠다고 장담하고 있다. 그는 거의 같은 수의 범죄 희생자들이 쇽 트라마에서 치료를 받아 사망하지 않기 때문에 11시 뉴스에 나오지 않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오말리의 재선 당선이 거의 확실하다고 예측한다.
쇽 트라마 센터의 업무는 전화벨 소리가 울리며 시작된다. 이 전화기는 부엌에 있는 전자식 무선전화기가 아니라 <아이 러브 루시> 같은 드라마 재방송에 나오는 옛날 학교의 벽에 걸려 있는 전화처럼 생겼다. 이 전화벨 소리는 근처에 있는 백만 달러짜리 기계들에서 나오는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신호음과 왠지 불협화음을 이루는 것처럼 들린다. 간호사나 의료요원이 전화를 받는다. “쇽 트라마 센터 입니다” 전화 반대편에서는 의료요원이 구급차나 볼티모어주의 12대 헬기 중 한 대를 통해 병원 측에 어떤 환자가 이송중이며 도착까지 얼마나 걸릴지 보고한다.
간호사는 보드에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색깔의 마커로 MVC(자동차 충돌), GSW(총상), MSW(칼에 여러 번 찔린 부상) 같은 약어들을 자세히 써 넣는다. 이 보드를 보면 일상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사고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신주를 들이받은 자동차, 가슴을 향한 두 번의 총기발사, 둔부의 총상, 톱에 잘린 머리, 트럭에 받힌 보행인, 칼에 등을 찔린 사건들이 즐비하다.
몇 분 후 문이 활짝 열리자 10개의 외상 병동이 보인다. 이 병실들이 꽉 차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환자가 넘쳐서 한 병실에 여러 명의 환자들이 들어가기도 한다. 에릭 퍼거슨이 도착하자 그는 이 병실들 중 한곳으로 실려 갔는데, 그곳에서 퍼거슨은 마치 분홍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공격을 받는 것 같았다. 10여 명의 의사와 간호사, 전문 기술진들이 몰려들어 각자 정해진 업무를 수행하면서 목을 닦거나 상처를 손보고, 전해질 액을 주입하는가 하면 맥박과 호흡, 체온을 측정한다. 쇽 트라마는 환자들이 방문해 단순히 바지를 입고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모든 옷은 절단되어 벗겨진다. 그런 다음 누구나 항문에 손가락을 넣어 척추 부상이 없는지 확인하는 “트라마식 진단”을 받게 된다. 이 조치를 취하다 보면 환자들의 거센 저항을 받기 일쑤다. 도착한지 채 1분도 되지 않아 퍼거슨을 검사하던 의사들은 그의 폐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료진의 진단을 확인했다. 이들은 원인을 찾아야만 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1960년대 초 고집스럽고 말이 빠르며 공상가였던 외과의사 알 애덤스 코울리는 메릴랜드 대학 병원 지하실을 확보해 사망실험실을 열었다. 코울리는 한 가지 육감, 즉 외상으로 인한 사망 과정은 대략 1시간 정도가 걸린다는 점을 연구하려 했다. 사망실험실이라는 명칭은 잘못 붙여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젊은 의사였던 코울리가 2차대전 때 유럽의 한 병원에서 쌓은 경험 덕분에 이곳을 한 번 이상 찾게 된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곳 의사들은 칼질 한 번으로 배를 가를 수 있었죠”라고 그는 자신이 전쟁 중 본 적이 있는 외과의사들에 관해 말한다. “한 번에 한 겹씩 지혈을 해가며 절개하는 우리와는 달랐죠. 수건으로 닦으며 맨손으로 해냈어요. 재빠르게 내장에까지 이르면 잡다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면장갑을 끼곤 했죠. 그리고는 자기들 식으로 처치를 하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탁월한 솜씨에 속도도 빨라서 미국에서라면 3시간 걸릴 일을 40분 안에 해치웠어요” .
이런 경험과 사망 실험실에서의 연구를 통해 코울리는 스스로 ‘황금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밝혀냈다. “쇼크를 죽어가는 과정 중간의 휴지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숨을 거두기 바로 전 순간에는 분주해진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죽기 전에 많은 화학적 작용들이 발생합니다. 저희가 발견해낸 바로는 쇼크 상태가 오래되면 결국 죽는다는 겁니다. 10분 안에 죽을 수도 있고 1주후에 죽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사망합니다. 그래서 쇼크 환자를 치료할 경우에는 빨리 해야 합니다. 60분 정도 밖에는 시간이 없으니까요. 사고 발생 후 1 시간 이내에 환자에게 가서 출혈을 멈춰 혈압을 회복시키면 살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상치료와 관련한 모든 도구와 치료방식은 이런 통찰과 쇽 트라마의 시설 배치 방식에서 비롯된다. 10개 병동에는 흉관과 식염수, 도뇨관과 거즈, 그 외 모든 것들이 똑같이 배치되어 있다. 수술실도 3층이 아니라 복도 끝에 있고 CT 스캐너도 위층에 있는 게 아니라 복도 끝 반대편에 있다. 의사들은 병원 내 어디에서든 모든 컴퓨터 화면을 통해 스캔 사진을 꺼내볼 수 있다. 쇽 트라마에는 간호사실 옆에 자체 혈액은행까지 갖춰져 있다.
환자들을 병원으로 신속하게 이송하는 것도 중요하다. 1970년 코울리는 주 당국을 설득해 주 차원의 응급의료서비스 시스템을 발족시키도록 했다. 80년대에 들어서자 헬기들이 도입되면서 이 시스템은 주 전역에서 발생하는 환자들을 사고지점에 가장 가까운 외과 시설로 긴급 이송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 미국 내 최고 수준의 응급의료서비스를 갖춘 메릴랜드는 볼티모어에 커뮤니케이션 센터를 두고 미국 내 5개 지역의 구급차와 헬기들의 대응 방안을 조절한다. 헬기에도 구급차에 갖춰진 것과 같은 구명 장비들이 장착되어 있다. 환자들은 계속 치료를 받으면서 기내에서 준의료진에 의해 외상의 정도를 평가받는다. 가장 위급한 환자들은 쇽 트라마로 이송된다.
뉴욕으로 이주한 토마스 스켈리라는 의사가 오늘 쇽 트라마의 운영 담당자다. 걸음걸이가 빠르고 키가 작은 그는 수천 명의 목숨을 구한 의사처럼 자신만만한 태도로 복도를 활보한다. 부담당자인 카넬 쿠퍼도 다른 쪽에서 걸어오고 있다. 키가 크고 근육질에 잘 생긴 쿠퍼는 꼬치꼬치 캐물어야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한 작은 마을에서 증조부모들과 살다가 예일 대학교에 가려고 고향을 떠났다는 사실을 말했다. 두 사람은 “쇽 트라마의 장점은 환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헌신을 다하는 의료진들에 있다”면서 환자에 대한 의료진들의 인간적인 따뜻한 감정을 높이 평가했다. 이런 점은 자신들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사망한 환자에 대해 진심어린 애도의 뜻을 표하는 의료진들에서 엿볼 수 있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은어들은 많다. ‘기차 파편’은 여러 가지 중상을 입은 환자를 가리킨다. ‘먹구름’은 바쁠 때만 근무하는 것처럼 보이는 쇽 트라마의 직원을 말한다. 에릭 퍼거슨 같은 사람은 이곳을 자주 들락거리다 보니 ‘단골’이란 별명이 붙었다. 농장에 사는 한 간호사는 자신이 키우는 소와 돼지에게 병원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동물이 죽으면 같은 이름의 동료에게 가져와 “자, 저녁식사야”라는 농담을 하곤 한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쇽 트라마 직원들은 모두 기술을 경외의 대상으로 본다. 이곳은 온갖 의료장비를 갖춘 가상 대형완구점과 같다. 배 속의 액체를 수초 내에 탐지할 수 있는 휴대형 초음파기의 도움으로 의사들은 환자를 침상에 똑바로 앉힌 채 바로 수술을 해야 할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환자의 혀 밑에서 체온을 재듯 탐침을 붙여 넣어 1분내로 환자의 세포내에 충분한 산소가 있는지 알아낼 수도 있다.
퍼거슨이 출혈로 이송된 이후 쇽 트라마의 직원들은 혈우병 환자용으로 개발된 약물인 ‘팩터 VIIa’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보통 ‘팩터 7’로 알려져 있는 이 약물은 유전자 재조합형 단백질로 인체내 혈액응고 항원을 복제한다. 얼마 전 한 남자가 심장과 간을 칼에 찔린 채 쇽 트라마로 긴급 이송되어 왔다. 한 외과의사의 말처럼 그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의사들은 곧 그의 가슴을 열고 심장을 꿰맨 다음 출혈을 멈추기 위해 팩터 7을 주입했다. 그는 1주일 후 퇴원했다.
1960년대 초 고집스럽고 말이 빠르며 공상가였던 외과의사 알 애덤스 코울리는 메릴랜드 대학 병원 지하실을 확보해 사망실험실을 열었다. 코울리는 한 가지 육감, 즉 외상으로 인한 사망 과정은 대략 1시간 정도가 걸린다는 점을 연구하려 했다. 사망실험실이라는 명칭은 잘못 붙여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젊은 의사였던 코울리가 2차대전 때 유럽의 한 병원에서 쌓은 경험 덕분에 이곳을 한 번 이상 찾게 된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곳 의사들은 칼질 한 번으로 배를 가를 수 있었죠”라고 그는 자신이 전쟁 중 본 적이 있는 외과의사들에 관해 말한다. “한 번에 한 겹씩 지혈을 해가며 절개하는 우리와는 달랐죠. 수건으로 닦으며 맨손으로 해냈어요. 재빠르게 내장에까지 이르면 잡다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면장갑을 끼곤 했죠. 그리고는 자기들 식으로 처치를 하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탁월한 솜씨에 속도도 빨라서 미국에서라면 3시간 걸릴 일을 40분 안에 해치웠어요” .
이런 경험과 사망 실험실에서의 연구를 통해 코울리는 스스로 ‘황금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밝혀냈다. “쇼크를 죽어가는 과정 중간의 휴지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숨을 거두기 바로 전 순간에는 분주해진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죽기 전에 많은 화학적 작용들이 발생합니다. 저희가 발견해낸 바로는 쇼크 상태가 오래되면 결국 죽는다는 겁니다. 10분 안에 죽을 수도 있고 1주후에 죽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사망합니다. 그래서 쇼크 환자를 치료할 경우에는 빨리 해야 합니다. 60분 정도 밖에는 시간이 없으니까요. 사고 발생 후 1 시간 이내에 환자에게 가서 출혈을 멈춰 혈압을 회복시키면 살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상치료와 관련한 모든 도구와 치료방식은 이런 통찰과 쇽 트라마의 시설 배치 방식에서 비롯된다. 10개 병동에는 흉관과 식염수, 도뇨관과 거즈, 그 외 모든 것들이 똑같이 배치되어 있다. 수술실도 3층이 아니라 복도 끝에 있고 CT 스캐너도 위층에 있는 게 아니라 복도 끝 반대편에 있다. 의사들은 병원 내 어디에서든 모든 컴퓨터 화면을 통해 스캔 사진을 꺼내볼 수 있다. 쇽 트라마에는 간호사실 옆에 자체 혈액은행까지 갖춰져 있다.
환자들을 병원으로 신속하게 이송하는 것도 중요하다. 1970년 코울리는 주 당국을 설득해 주 차원의 응급의료서비스 시스템을 발족시키도록 했다. 80년대에 들어서자 헬기들이 도입되면서 이 시스템은 주 전역에서 발생하는 환자들을 사고지점에 가장 가까운 외과 시설로 긴급 이송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 미국 내 최고 수준의 응급의료서비스를 갖춘 메릴랜드는 볼티모어에 커뮤니케이션 센터를 두고 미국 내 5개 지역의 구급차와 헬기들의 대응 방안을 조절한다. 헬기에도 구급차에 갖춰진 것과 같은 구명 장비들이 장착되어 있다. 환자들은 계속 치료를 받으면서 기내에서 준의료진에 의해 외상의 정도를 평가받는다. 가장 위급한 환자들은 쇽 트라마로 이송된다.
뉴욕으로 이주한 토마스 스켈리라는 의사가 오늘 쇽 트라마의 운영 담당자다. 걸음걸이가 빠르고 키가 작은 그는 수천 명의 목숨을 구한 의사처럼 자신만만한 태도로 복도를 활보한다. 부담당자인 카넬 쿠퍼도 다른 쪽에서 걸어오고 있다. 키가 크고 근육질에 잘 생긴 쿠퍼는 꼬치꼬치 캐물어야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한 작은 마을에서 증조부모들과 살다가 예일 대학교에 가려고 고향을 떠났다는 사실을 말했다. 두 사람은 “쇽 트라마의 장점은 환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헌신을 다하는 의료진들에 있다”면서 환자에 대한 의료진들의 인간적인 따뜻한 감정을 높이 평가했다. 이런 점은 자신들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사망한 환자에 대해 진심어린 애도의 뜻을 표하는 의료진들에서 엿볼 수 있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은어들은 많다. ‘기차 파편’은 여러 가지 중상을 입은 환자를 가리킨다. ‘먹구름’은 바쁠 때만 근무하는 것처럼 보이는 쇽 트라마의 직원을 말한다. 에릭 퍼거슨 같은 사람은 이곳을 자주 들락거리다 보니 ‘단골’이란 별명이 붙었다. 농장에 사는 한 간호사는 자신이 키우는 소와 돼지에게 병원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동물이 죽으면 같은 이름의 동료에게 가져와 “자, 저녁식사야”라는 농담을 하곤 한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쇽 트라마 직원들은 모두 기술을 경외의 대상으로 본다. 이곳은 온갖 의료장비를 갖춘 가상 대형완구점과 같다. 배 속의 액체를 수초 내에 탐지할 수 있는 휴대형 초음파기의 도움으로 의사들은 환자를 침상에 똑바로 앉힌 채 바로 수술을 해야 할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환자의 혀 밑에서 체온을 재듯 탐침을 붙여 넣어 1분내로 환자의 세포내에 충분한 산소가 있는지 알아낼 수도 있다.
퍼거슨이 출혈로 이송된 이후 쇽 트라마의 직원들은 혈우병 환자용으로 개발된 약물인 ‘팩터 VIIa’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보통 ‘팩터 7’로 알려져 있는 이 약물은 유전자 재조합형 단백질로 인체내 혈액응고 항원을 복제한다. 얼마 전 한 남자가 심장과 간을 칼에 찔린 채 쇽 트라마로 긴급 이송되어 왔다. 한 외과의사의 말처럼 그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의사들은 곧 그의 가슴을 열고 심장을 꿰맨 다음 출혈을 멈추기 위해 팩터 7을 주입했다. 그는 1주일 후 퇴원했다.
올해 여름 쇽 트라마의 의사들은 미국에서 최초로 인체의 전신사진촬영을 13초 만에 끝낼 수 있는 X-레이기를 사용하기 시작해 총알에 손상을 입는 곳을 거의 즉각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쇽 트라마의 의사들은 곧 대규모 인공혈액 시험 사용을 고대하고 있다. 지난 몇 년 사이 의사들은 복부 수술에 진공식 봉합술을 시도해 왔다. 틈을 몸에 완전히 밀착시킬 경우 압력이 증가하면서 안쪽 기관이 감염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외과 의사들은 이 구멍에 개포형 발포제를 넣은 후 이를 투명한 접착막으로 다시 한 번 덮어씌운다. 이 막에 관을 삽입해 잔류물과 감염된 조직을 빨아냄으로써 혈류 촉진과 붓기를 방지해 감염 가능성을 제거해 버린다. 게다가 진공식 봉합술은 상처 치유 기간을 절반으로 줄여준다.
향후 수개월 내에 볼티모어의 의사들이 사용하게 될 가장 훌륭한 신형 장비들 중에는 미 육군과 적십자사가 공동 개발한 섬유질 봉합 반창고가 있다. 전맥 밀가루로 만든 긴 네모형 과자처럼 생긴 이 반창고는 건조 섬유소원과 트롬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두성분이 합쳐지면 강력한 생물학적 봉합제가 된다. 이 물질로 크게 찢긴 틈들을 메우면 간조차도 돌부리에 채인 발가락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게 된다. 외과의들이 이 반창고를 구멍에 붙이면 사람 몸에서 나오는 혈청보다 20배나 강력한 혈청이 형성되면서 3시간 걸릴 수술이 10초면 끝이 난다. 의사들이 총상 부위에 이 섬유소 기포를 주입하면 원래 크기의 10배로 팽창하면서 상처 부위의 벽에 들러붙어 출혈을 멈추게 한다.
어떻게든 기술은 때때로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어느 정도 질서를 가져다준다. 쇽 트라마에서는 한 병실에서 노상강도를 당해 보도블록으로 머리를 가격당한 흑인 노인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웨스트버지니아 출신 10대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다. 2개의 병실마다 술주정꾼 환자가 한 명씩 들어올 수도 있다. 이들 중 1명이 간호사와 부딪치면서 “당신은 결국 감옥에 갈거예요!”라고 소리치면 간호사는 “아마 그럴걸요”라고 맞장구를 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모두가 최첨단 장비들에 둘러싸여 이렇게 지내는 동안 구석에 놓인 결빙기가 10분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바닥에 얼음을 토해낸다. 계속 반복되는 이 결빙기의 고장에 대해 아무도 고칠 생각은 않으면서 “코울리의 유령”이라고들 애기한다.
그런데 가끔 이들 모두가 동시에 주의를 집중하는 경우들이 있다. 출산 직후의 한 여자가 청소 트럭에 정면으로 부딪친 후 실려 들어왔는데 아기는 정상이지만 엄마는 심장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경우라든지, 자신의 아파트에서 머리에 총을 쏴 자살을 시도한 후 아버지에 의해 발견되어 숨이 거의 끊긴 상태에서 헬기에 실려 이송되어 오는 여자의 경우, 또는 에릭 퍼거슨처럼 숨을 쉬지 않은 채 무의식 상태로 실려 오는 경우들이 그것이다. 퍼거슨의 폐에는 공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출혈이 너무 심한데다 찔린 구멍들이 너무 작아서 몇 차례나 찔렸는지, 얼음 꼬챙이에 의해 실제 관통된 부분이 어디인지를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의사들이 그가 기흉에 걸렸는지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폐의 소리를 직접 들어보는 방법 밖에 없다. 퍼거슨은 한쪽 폐 둘레의 늑골에 공기가 차 있어서 폐가 팽창할 공간이 없었다. 이런 상태를 신속히 치유하려면 갈비뼈와 늑골 사이로 흉관을 삽입해 공기가 빠져나오면서 폐가 팽창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쇽 트라마 의사들은 신속히 이대로 조치했다. 하지만 퍼거슨의 혈압은 계속 떨어졌고 호흡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외상 치료용 기술 발전들 중 가장 독보적인 것은 CT 스캐너였는데, 1980년대에 병원들에 도입된 이 장비를 이용해 의사들은 X-레이의 한계를 넘어 간, 폐, 장이나 뇌와 같은 섬세한 조직을 직접 촬영할 수 있었다. 1989년도에만 해도 이 장비들은 편리하긴 했지만 속도가 느려서 신체 전부위를 촬영하는 데 1시간 이상이나 걸렸고 아무리 잘 찍어도 영상이 거칠게 나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CT 스캐너들의 성능이 대폭 향상되면서 속도도 눈부시게 빨라져 1분 내에 원하는 부위를 촬영한다. 지난 1~2년 사이 다중분할 CT 스캐너가 시장에 선보이면서 한 번에 16장의 고해상도 이미지를 0.5초에 촬영할 수 있게 되어 머리에서 발끝까지 몇 초만에 스캔이 가능하다. 이제 의사들은 환자를 여러 각도에서 검사할 수 있어 미세하지만 치명적일 수도 있는 파열된 혈관 부위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
퍼거슨이 여전히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의사들은 재빨리 그를 외과 병실에서 CT 스캐너실로 옮겨 보다 세밀한 검사를 했다. 그 결과 한쪽 폐에 기흉과 혈흉이 있어 공기뿐 아니라 피까지도 스며들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의 폐는 팽창할 공간이 없어서 의사들은 신속하게 또다른 흉관을 삽입했다. 퍼거슨의 혈압이 오르면서 폐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10년 전 CT 스캔이 현재보다 훨씬 오래 걸렸을 때였더라면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라고 쇽 트라마의 한 의사는 말한다. “이미 그 친구는 고인이 되었을 겁니다”. 수술 1시간 후 의사들은 에릭 퍼거슨의 가족에게 그가 곧 나을 거라고 알렸다.
쇽 트라마의 직원들에게 에릭 퍼거슨이 범죄자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심각한 상태라는 것 외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이곳은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다. 종신형으로 복역하다 다른 종신형 죄수에게 수 십군데 칼에 찔린 살인범이나 8인치짜리 음경을 달고 다니다가 얼굴에 총을 맞은 여자 마약상, 필스버리 도우 보이 문신을 새긴 채 마리화나를 피우다 배에 총을 맞은 젊은 남자들 모두 이곳에서 목숨을 건졌다. 쇽 트라마의 주요 업무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일 뿐 그 후에 환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건 그건 환자 몫이다.
이제 36세인 에릭 퍼거슨은 여전히 아침 이른 시각인 7시경에 일어나지만 일어나자마자 거리로 나가 싸구려 코카인과 헤로인을 팔지는 않는다. 대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준비를 한다. 그는 80년대에 마약을 팔기 시작했을 즈음 만난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당시 버스 운전을 했다. 둘은 힘을 합쳐 집을 샀고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간다.
퍼거슨은 카운셀링을 공부하려고 대학 입학 준비를 하고 있다. 4년 동안 그는 마약 판매에서 손을 뗐고, 그가 아직 병원 침상에 누워있을 때 제의가 온 쇽 트라마 보급 프로그램 업무를 한다. 그들은 퍼거슨에게 몇 가지 옵션을 보여주며 그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만 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크게 공감하며 거리의 친구들 모두가 자신처럼 대우받아야 한다고 결심하고는 이들이 쇽 트라마에 실려 오면 자신의 얘기를 들려준다. 불행하게도 이런 환자들의 수는 줄어들고 있지 않지만 이들 중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퍼거슨의 도움을 받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죽었을 사람들이 이제는 버젓이 살아있는 것이다.
마이클 로젠월드는 <보스톤 글로브>지의 편집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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