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과제로 내세워지기는 했지만 “과학기술중심사회 구축”을 위한 정부의 활동은 다른 추진 과제와 비교해 볼 때 한동안 가시적인 움직임이 없었다. “동북아경제중심”, “정부혁신·지방분권”, “국가균형발전” 등의 과제는 영향력 있는 장관급의 민간 위원장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활동을 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중심사회 구축”을 위한 정부의 활동은 상당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구체적인 활동이 나오지 않자 주변에서는 역시 이 과제는 구호성에 그치지 않겠느냐는 비아냥대는 소리까지 들렸다. 아무튼 과학기술부가 중심이 되어 과학기술중심사회 기획위원회가 구성되고 지난 5월 22일에는 회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하니 다시금 이 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기대를 걸어본다.
과학기술중심사회 인프라 기반한 사회돼야
막상 위원회가 구성되고 활동 방향이 일반에게 제시되었지만, 그 세부를 살펴보면 “과학기술중심사회”의 중심 개념이나 그 구체적인 모습은 여전히 막연하다. 물론 이 “과학기술중심사회 구축”이라는 국정과제는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시절 제시한 공약과 이것을 구체화했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정책보고서를 더욱 발전시키는 방향에서 전개될 것이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첨단기술에 바탕을 둔 신산업 창출, 과학기술계의 우수 인력확보 및 과학기술인의 사기진작 등과 아울러 원칙과 신뢰, 그리고 과학기술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의식문화 운동도 이 “과학기술중심사회 구축”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과거에 추진하던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을 새로운 정부가 한 단계 높인 형태로 일관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 표현으로 비쳐진다.
과학기술중심사회의 구현을 위한 정부의 노력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5년 내지 10년 뒤에 우리사회를 먹여 살릴 핵심기술을 조기에 찾아내 이를 집중적으로 육성함으로써 미래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비하자는 것이다. 정부는 이미 과학기술기본계획과 국가과학기술지도를 작성하고 예측가능한 미래의 핵심 과학기술 후보를 물색해놓고 있다. 이런 기본 방향에 의거하여 새로운 첨단 융합 학문 분야는 물론 현재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전략 과학기술중심사회의 미래상은 과학기술 인프라 구축, 과학기술 기본 계획, 국가과학기술지도, 국가과학문화기본계획 등을 종합적으로 묘사하는 그림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타분야 조언과 공인구축 절실
과학기술중심사회에 거는 기대가 큰 만큼 이 과제를 추진할 때 좀 유념해 주었으면하는 점이 몇 가지 있다. 무릇 중심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전체의 중심이라는 확고한 철학과 믿음이 있어야 함은 물론 다른 분야의 사람들도 특정 분야가 중심임을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과학기술중심사회를 구축하는 작업은 과학기술자들의 집안잔치가 되어서는 안되며,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조언과 협력을 얻어 자타가 공인하는 과학기술중심사회의 구축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과학보다는 반대로 사회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적절한 대처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과학기술 중심사회가 과학기술 만능사회는 아닐 것이다. 또한 최근에 와서 과학기술은 사회와는 상관없이 독야청청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요구에 맞추어 그 모습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60년 전에 버니버 부시는 기초과학은 끝없이 신산업을 창출해주는 마지막 남은 미개척지대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부시의 주장과는 달리 과학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가 변혁과 혁신의 중심에 서야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정부의 과학기술중심사회 구축 논의는 바로 이런 변화된 목소리를 포용하며 과학기술의 위상을 다시 확보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순수 과학기술과 사회중심 과학기술 조화 필요
과학기술의 사회적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과학기술의 긍정적인 모습뿐만이 아니라 부정적인 측면도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현대 과학기술이 야기하는 다양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고 과학기술계와 시민사회와의 새로운 합의후 논의는 이런 일련의 움직임과의 마찰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즉, 미래의 올바른 과학기술 정책은 과학기술 중심사회를 구축하려는 움직임과 사회중심의 과학기술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슬기롭게 조화시키는 곳에서 얻어질 것이다.
청소년들이 과학기술계를 기피하는 것은 사회의 발전과정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경향이며, 이 문제는 비단 이공계만의 문제가 아니고, 인문사회분야는 이공계 분야보다 오히려 더욱 심각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과학기술중심사회를 구축한다는 것이 인문학과 같은 보호학문 분야와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지 않도록 사전에 상호 이해를 돈독히 해야할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사회 문제가 되어온 이공계 기피문제에 대해서는 이번 기회에 아주 근본적인 차원에서 해결점을 제시하기를 기대해 본다. 만약 이번에도 정부의 정책이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피상적인 관심 표명만이 계속될 경우에는 과학기술중심사회 구축을 위한 정부의 노력은 공허한 사회적, 정치적 구호에 그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정부차원 과학기술 지원 필요
과학기술중심사회 구축은 좁게는 정부 부처 내에서 과학기술 분야가 중심을 잡는데 1차적인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다. 부처이기주의가 난무하는 중앙부처 사이에서 과학기술 분야가 자신들의 자율성조차 확보하지 못하면서 과학기술중심사회 구축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과학기술 분야가 정부 부처 내에서 힘이 약하다는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고 최고통치자가 직접 나서서 과학기술 분야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해주는 것이 바로 과학기술중심사회를 하루라도 앞당기는 길이 될 것이다.
과학기술중심사회는 정부의 관료들이나 몇몇 위원회, 실무 추진팀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은 분명 아니다. 과학기술이 우리 사회의 중심에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과학자들 스스로 피나는 노력과 대오각성이 필요하다. 오늘날 과학기술자들이 사회 속에서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미래의 인력 수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정부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사회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굳히지 못하고 제대로 처신하지 못한 과학자들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다.
과학기술인들 사회적 위치 후퇴
과거에 과학 활동은 금전적인 걱정이 별로 없고 사회적 권력도 일정 부분 가지고 있는 상류층들에 의해 주로 수행되었다. 반면 기술 활동은 주로 중하류 층에 수행되었지만, 그들은 기술이 지닌 실용성을 바탕으로 사회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굳히는 훌륭한 생존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최근 우리나라 과학기술자들, 특히 기초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과거 과학분야에 종사하던 상류층들이 지녔던 돈과 권력도 향유하지 못하고, 서민층들이 지녔던 강한 풀뿌리 생존 능력도 상실한 채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초라한 상황을 극복하는 것도 1차적으로는 과학기술자들이 스스로 해야 할 일이다. 정부가 과학기술자들의 사회적 위상 제고를 위해 이공계 출신자들의 공무원 임용확대를 추진한다고 해서 과학기술중심사회가 구축된다고 생각하면 커다란 오산이다. 이공계 출신자들이 공무원 임용과 승진 과정에서 부진한 성적을 보이는 것은 우리나라 이공계 교육 방식 자체의 문제도 있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과학기술자들이 공직사회에서의 생존 능력이 다른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흡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 스스로 노력하는 자세 요구돼
과학기술중심사회 구축 논의가 의식문화 부분까지 확대되어 전개된다고 해 평소 과학문화에 관심이 많은 필자로서는 이 부분에 대해 거는 기대가 크다. 과학기술이 신산업을 창출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은 우리의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사회문화적으로 체계화돼야 보다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과학기술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잘 느끼지 못하더라도 위기의 순간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뒷받침해주는 힘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메커니즘이 사회 곳곳에 파고들 때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과학기술중심사회는 그 진가를 발휘할 것이다.
임경순 포항공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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