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상황은 바뀌고 있다. 기능보다는 디자인을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비자의 욕구에서도 잘 드러난다. TV나 인터넷 쇼핑업체들에 따르면 최근 소비자들은 ‘기능보다 디자인을 더 중요시 여기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세련된 디자인이 보기에도 좋지만 첨단기술이 적용되고 기능이 복잡할수록 사용성(Usability)에 문제가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친절하고 상세하게 소개된 사용설명서나 안내서를 외면하는 소비자의 심리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다. 핵심은 바로 사용자의 인터페이스(UI : User Interface). UI는 ‘접점, 접촉’이란 뜻으로 냉장고, 오디오 등 가전제품을 비롯해 컴퓨터, 자동차, 비행기, 휴대전화기, 의료기 등 모든 제품디자인에 적용되는 ‘사용자의 편리한 체험’을 담고 있다. 기업은 이제 단순한 ‘소비자’(consumer)를 뛰어 넘어 ‘사용자’(user)자의 입장에서 제품개발에 나서고 있다. UI는 어떻게 제품을 ‘결정’하고 미래의 UI 컨셉은 무엇인지 UI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기능의 복잡성보다 사용 편리성이 우선
웹 이용자들이 급증하면서 이들을 잡으려는 기업들의 치열한 경쟁은 바로 UI의 개선으로 집약되고 있다. 웹사이트를 운영자는 회원의 확충과 더불어 신뢰성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UI를 끊임없이 개선하고 있다. 은행, 카드사 등 금융기관은 물론, 홈쇼핑업체들도 UI의 개선을 통해 효과를 톡톡히 보는 사례가 늘고 있다. LG생활건강의 1대 1 맞춤 온라인 화장품 브랜드인 ‘E·TUNE’사이트는 평가 프로젝트를 통해 UI를 개선한 결과 한 달만에 회원수가 2천명에서 10만명으로 급증했다.
e-비즈니스 통합업체인 FID(대표 김지훈)가 운영하는 CX Lab(고객경험연구소)의 박태성 컨설턴트는 이에 대해 “그동안 웹사이트의 고객경험의 인식이 확산되지 않아 많은 웹사이트들이 사용자들의 정확한 요구를 담아내지 못해 왔다”며 “최근에는 맞춤 컨설팅을 요구하는 업체가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웹사이트의 디자인과 신뢰성, e-브랜드 컨설팅, 맞춤 UI 설계 등의 정보를 잘 활용하면 효율적인 웹사이트 운용이 보장되는 것이다.
로봇의 경우를 살펴보자. 로봇은 산업현장에서 어려운 일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 가정에서도 청소와 간호 등을 맡는 등 역할이 더 넓어지고 있다. 소니의 강아지 로봇 ‘아이보’(Aibo)는 일본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서도 대덕밸리의 한울로보틱스 등이 청소기 로봇을 개발한 바 있다. 삼성전자가 개발한 청소 로봇 UI를 담당한 GUI 디자인의 김경순 사장은 “로봇은 일반인에게 아직까지 생소하기 때문에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문제”라고 UI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김 사장은 “로봇에서 UI의 역할은 제한된 영역에서 사용자가 사용하기 쉬운 인터페이스 구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GUI의 디자인은 청소와 보안, 수동조작과 실시간 정보 모드로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스스로 청소영역을 설정하고 배터리가 부족할 때 충전장치를 찾아 자동으로 전원에 연결하는 이 로봇은 장애물도 알아서 피하는 그야말로 사용자의 편리성을 위해 다양한 친(親)사용자(user-friendly) 기능을 갖추고 있다. 기능은 물론 UI 디자인을 철저하게 적용함으로써 새로운 환경에서 사용되는 생소함을 훨씬 줄여줄 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반인에 생소한 제품일수록 제품의 기능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의 구성은 더욱 중요해진다.
“디자인에는 공학적·자연과학적·인문학적 요소 포함”
기능에 디자인을 맞추었던 시대는 가고 있다. ‘모든 기능은 디자인과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디자인은 이제 기능을 담아 내는 일종의 ‘그릇’이 된 셈이다. 미래에 선보이는 기술을 상품화하는데는 아예 초기단계부터 제품 디자이너들을 참여시켜 깜찍한 외관을 지닌 제품을 만드는 경향이 뚜렷해 질 것이다. 아무리 간단한 전자제품이라도 우수한 기능만 가지고는 소비자에게 어필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기능뿐 아니라 외양까지 ‘날씬하고 매력적’이어야 비로소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개발자들은 이를 두고 전자제품도 이젠 ‘패션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과거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경험과 상식 등에 의존해 왔으나 최근에는 인간공학과 인지공학 등 공학적인 접근을 통해 디자인을 개발하고 있는 추세다.
일례로 막대(Bar)형 휴대전화만을 생산, 판매하는 노키아는 자국의 막대 휴대디자인을 폴더로 바꿔 한국에서 판매하고 있다. 물론 문화적인 요인이 뒤따르겠지만 막대형 디자인의 휴대폰이 한국인들에게는 좀처럼 어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디자인이 변하면서 내부 메뉴도 바뀌었다. 디자인에 따라 기능의 일부도 자연스럽게 바꿔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품 개발자들은 디자인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이 너무 소홀히 되어왔다고 지적받고 있다. 한국 HCI(Human Computer Interaction) 연구원의 한정민 회장은 “오래 전부터 디자인을 가르치는 학과에서는 인간공학, UI 등을 교육하고 있다”며 “디자인의 단순한 면만이 부각되어 그 역할이 축소되었었다”고 말한다. 디자인을 배울 때도 공학적인 접근을 통해 제품의 디자인을 설계한다는 것이다. 한 회장은 “디자인에 중요한 개념을 제공하는 인터페이스는 정보기기뿐 아니라 다양한 제품의 디자인의 문제해결에 많은 응용과 해법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HCI는 인간과 컴퓨터의 자연스러운 상호작용 과정의 설계와 구현을 하는 것으로 음성인식과 얼굴인식, 표정합성, 자연어 대화시스템, 실시간 통역 시스템 등의 연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영역이다.
‘디지털 프리덤’ 시대로
그렇다면 미래 디지털 정보기기들은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가고 있을까. 작년 미국의 한 IT전문지는 기존의 UI가 단지 인터페이스를 확장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5세대 컴퓨팅 환경에서는 윈도나 웹브라우저가 아닌 ‘메시지’ 중심의 UI가 등장할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메시지 중심이란 말 그대로 음성으로 컴퓨터가 작동해 마치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휴대’나 ‘소지’의 개념에서 마치 옷처럼 가볍게 ‘입는’(wearable)개념으로 바뀌게 된다는 뜻이다.
삼성전자의 진대제 전 사장은 작년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CES 2002’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자사의 홈 미디어 센터를 소개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자유롭게 디지털 기술의 혜택을 누릴 게 되는 ‘디지털 프리덤(digital freedom)’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디지털 프리덤은 일반인들은 물론, 그동안 디지털 시대에서 소외되어 왔던 사람들이 디지털 기술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숨어있다. 현재 시각 장애자나 청각 장애자들은 디지털 기술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었다. 그렇지만 디지털 혁명이 진행되어 메시지 중심의 시대가 열리게 되면 시각 장애자는 아마도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하게 될 수 있을 것이고 청각 장애자는 자연스럽게 음성을 시각적인 표현으로 전환해 음을 ‘볼 수’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디지털 프리덤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UI, 디지털 프리덤 시대 해법 제공
지난달 독일 하노버에서 열렸던 ‘CeBIT 2003’에서 삼성전자는 인간의 몸짓 하나하나를 인식하는 미래 첨단형 인터페이스‘동작인식(gesture recognition)’제품을 선보였다. 이 제품은 마치 장갑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장치를 손에 끼고 자유롭게 움직이면 키보드 역할을 하게 되는 미래형 인터페이스 장치다.
미국 에센셜리얼리티사에서 나온 장갑모양의 키보드는 이미 시판중이다. 49달러의 ‘P5 컨트롤러’라고 하는 이 장갑모양의 키보드는 민감한 센서가 장착되어 있어 사용자의 움직임을 베이스 스테이션으로 보내 전송하는 시스템. 마이크로소프트사도 게임과 같이 조이스틱을 이용해 키보드 역할을 대신하는 제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기업들의 또다른 고민은 사용자의 성향이다. 아무리 디지털 프리덤 시대가 오고 있다고 하지만 언제나 고급 사용자의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UI 개발자들은 사용자 분석과 동향을 정확히 분석해야 하기 때문에 편리하면서도 세련된 UI를 개발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사용자의 연령층도 또 하나의 문제. 연령별로 사용하는 타입과 패턴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우스 클릭이 아주 빠른 20대, 트렌드를 잘 따라가는 30대, 제품의 품질을 정확히 집어내는 40대 등 연령별 욕구와 만족수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세대간의 차이를 극복하는 UI를 만들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디자인이 기능을 아주 빠른 속도로 선도한다는 점이다. 현재의 단순한 인간-기계의 인터페이스에서 인간의 신체적 특성에 초점을 맞춰 디자인 개발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인터페이스가 더욱 발달하려면 기능의 구조나 흐름 등의 설계를 위해 이용되는 정보공학, 기기가 작동되는 원리를 이해시켜 주는 전자공학이나 컴퓨터 공학 등에서 지식을 응용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도구는 바로 인간의 몸짓이나 인지능력이기 때문에 단순한 사고체계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해서는 안되며 컴퓨터 시뮬레이터를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의 제작기술이나 이를 통해 얻어지는 결과로 인한 지식을 응용하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UI는 이해와 학습, 추론, 기억 등을 연구하는 인간심리학의 근간으로 디지털 프리덤 시대를 맞이해 정보기기 디자인에 많은 해법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래 첨단기술개발에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박세훈기자<isurf@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