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5일(현지 시간) 영국 뉴캐슬역에서 내린 뒤 15분간 차로 달려 도착한 선덜랜드 엔비전 ASEC 기가팩토리 앞. 공장 가동을 앞두고 수십 명의 인부들이 헬멧을 쓴 채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었다. 공장 인근에는 풍력발전기 10여 대에 달린 프로펠러가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었다. 공장 입구 옆에는 ‘현재 채용 중(Now Hiring)’이라고 쓰인 현판이 달려 있었다.
이 공장의 총 생산능력은 15.8GWh. 연간 10만 대의 자동차에 들어갈 수 있는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다. ASEC는 이 공장을 통해 1000명 이상의 고용을 새로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공장은 같은 달 16일 공식 가동에 들어갔다.
ASEC 기가팩토리 뒤에는 영국수출금융청(UKEF)과 영국 국부펀드(NWF)가 있다. 이들 기관은 지난해 5월 정책 보증을 통해 민간 금융사들을 끌어와 10억 파운드(약 2조 원) 규모의 투자 재원을 마련했다. 투자에는 영국계 은행인 HSBC와 스탠더드차타드(SC)는 물론이고 미쓰이스미토모은행(SMBC) 같은 외국계 금융사도 참여했다. 보미크 누르 샤 UKEF 글로벌 자금조달 및 고객관리 담당 총괄은 “ASEC 기가팩토리는 영국의 정책금융기관 간 협업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며 “산업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는 영국 자동차 산업의 탈탄소화와 전기차 산업 부문 공급망의 탄력성을 위해서도 중요한 프로젝트”라고 소개했다.
실제로 영국 정부는 핵심전략산업을 키우기 위해 공금융 기관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UKEF는 2024·2025회계연도(2024년 4월~2025년 3월)에 전년보다 65% 늘어난 145억 파운드의 신규 자금을 공급해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영국 정부는 NWF가 보유한 278억 파운드 규모의 투자 여력도 활용할 방침이다. 마크 허드슨 UK파이낸스 책임은 “적극적인 재정·조세정책을 통해 생산적 분야에 자금을 투입하기에는 영국 정부의 재정 상황이 빠듯하다”며 “이런 점에서 공공금융기관의 보증을 통해 재정 중립적인 접근을 취하는 것이 합리적인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영국은 금융사 규제를 풀어 전략산업에 돈이 흘러 들어가게 하는 전략도 취하고 있다. 보험 분야 계리 규제 완화가 대표적이다. 영국 정부는 2024년 발표한 새 보험 계리 기준인 ‘솔벤시 UK(Solvency UK)’를 통해 각종 자본 규제를 완화한다고 밝혔다. 리스크 마진에 적용하는 자본비용률을 6%에서 4%로 낮추고 매칭 조정 대상 자산을 확대한 것이 뼈대다. 리스크 마진 규제가 완화되면 자본비용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어 보험사가 추가 자본을 투입할 여력이 생기게 된다. 매칭 조정은 보험사의 자산·부채 듀레이션(가중평균 만기)이 일치할 경우 이전보다 부채를 적게 평가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당국의 규제 완화는 자연스레 기업 대출과 투자 확대로 이어지고 있다. 영국보험협회(ABI)는 솔벤시 UK 도입에 따라 발생한 여유 재원을 토대로 10년간 1000억 파운드를 영국 내 생산적 분야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영국 정부는 은행 규제도 간소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일반 은행 업무와 투자은행(IB) 업무를 분리하는 ‘링펜싱(ring-fencing)’ 규제를 개정하기로 한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은 영국의 첨단산업 육성의 핵심 기반이 되고 있다. 현재 영국 정부는 △첨단 제조업 △디지털 기술 △생명과학 △청정에너지 △방산 △게임·광고·마케팅·예술 등 창조산업 △금융 △전문 비즈니스 서비스 등을 8대 전략산업으로 정하고 대대적인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영국 현지 금융계 관계자는 “지난해 무렵에만 해도 정부가 은행들에 세금 부담을 크게 지울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는데 지난해 11월 발표된 예산안에는 이 같은 내용이 빠졌다”며 “이는 영국 정부에서도 은행이 성장 촉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해석했다.
"금융, 경제성장 기여"…법에 역할 못박은 英
영국의 ‘금융 서비스 및 시장법’은 금융감독청(FCA)·건전성감독청(PRA)과 같은 금융 당국의 목표를 크게 두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먼저 기본 목표(primary objective)는 소비자 보호와 금융 안정성 및 시장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규제 제도를 마련하라는 것이다. 여기에 2차 목표(secondary objective)가 추가된다. ‘영국 경제의 국제 경쟁력과 중장기 성장(growth)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으로 금융 감독 당국에 경제성장을 고려하라고 규정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 금융위원회 설치법에도 ‘국민 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문구가 있는데 영국은 명확하게 성장을 짚어서 언급한 것이다. 영국 현지 금융계 관계자는 “금융 당국에 소비자 보호와 건전성 규제가 최우선으로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영국의 경제성장과 산업 경쟁력도 조화롭게 봐야 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이 2차 목표가 법제화된 것은 2023년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금융 경쟁력을 끌어와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이 과정에서 금융 당국이 산업 경쟁력을 반영해 규제 체계를 짜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영국 정부는 2차 목표를 도입하면서 “정부는 금융 산업이 국가 경제 전반의 성장 엔진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며 “잔존해 있던 유럽연합(EU) 측 법률에 따라 규율되던 세칙을 규제 당국이 정하게 된 상황에서 정부는 당국의 목표 역시 영국 경제의 국제 경쟁력과 중장기 성장을 뒷받침할 필요성을 반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봤다”고 밝혔다. 줄리 새클레이디 UK파이낸스 디렉터는 “2차 목표는 비교적 새로운 개념”이라며 “정책과 감독 측면에서 2차 목표가 모두 반영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규제를 도입할 때 이해관계자로부터 공식 의견 수렴 절차(콜 포 인풋·Call For Input)를 적극 활용하는 것도 영국의 특징이다.
"투자처 옥석가리는 금융사 경쟁력이 생산적 금융의 핵심"
“영국 정부가 8대 중점 산업(IS-8)을 선정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모두 영국이 뛰어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분야로 금융업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는 영역이죠. 결국 영국 정부의 산업 전략은 공공 정책과 시장의 힘을 결합해 투자를 촉진하는 데 있습니다.”
카림 하지(사진) KPMG 글로벌 금융 서비스 부문 헤드(대표)는 지난해 12월 15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영국 내에서 정부가 제시한 산업 전략에 대해서 긍정적인 분위기가 있다”며 “영국의 대형 은행들이 영국 정부가 선정한 중점 산업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밝혔다.
그는 영국 정부가 8대 중점 산업을 선정한 기반에는 시장 논리가 있었다고 진단했다. 애초에 금융 부문에서 유망한 투자처로 꼽는 부문을 영국 정부가 전략적으로 선택했다는 의미다.
하지 헤드는 “금융 서비스와 전문 서비스를 비롯해 핀테크 및 첨단 제조업 등은 영국이 이미 비교 우위를 보유한 영역이라 정책적으로 선택된 측면이 있다”며 “핀테크만 해도 영국이 미국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핀테크 투자 유입이 큰 나라”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영국의) 대형 은행들은 여유 자본을 전 세계 어디에서도 쓸 수 있지만 영국에 더 대출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며 “더 쉽게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시장이 움직이도록 하는 데 정책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영국 정부의 건전성 규제 완화 기조에 맞춰 각 은행·보험사들이 생산적 부문에 더 많은 투자를 약속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하지 헤드는 “자본 요건을 완화하면 여유 자본이 발생하니 이를 경제에 더 투자할 수 있다는 논리”라며 “은행과 보험사들이 자본 요건 완화에 맞춰 더 많은 자금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하는 배경”이라고 했다.
하지 헤드는 “영국에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업권 전반에서 강화된 자본 건전성 규제를 어느 정도 완화할 여지가 있다는 분위기가 있다”며 “다른 수단으로도 건전성을 관리할 수 있으니 자본 요건이 과도한 부분은 비례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하지 헤드는 “중요한 것은 이 같은 건전성 규제 완화가 금융사들에 과도한 위험을 감수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규제가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 금융사의 위험 회피를 부추기는 부분이 있는지 보고 위험과 수익의 균형을 맞추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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