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파운드화와 유로화의 원화 환율이 16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외환 당국이 달러 공급 확대에 나섰지만, 해외 투자 확대에 따른 구조적인 수급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는 한 고환율 기조는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23일 외환시장에 따르면 원·파운드 환율은 장중 1파운드당 2002원까지 오르며 2009년 9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2000원선을 넘어섰다. 원·유로 환율도 1유로당 1747원 안팎에서 거래되며 2009년 11월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공표한 기준 환율 역시 22일 기준 1유로당 1738.72원으로, 유로화 강세 흐름을 뒷받침했다.
유로화는 올해 1월 1505원 수준에서 거래되다 1년도 채 안 돼 약 16% 급등했고, 파운드화도 연초 1760원대에서 13.8% 올랐다. 다만 국제 외환시장에서 유로화나 파운드화가 달러 대비 특별한 강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에서는 이번 환율 급등의 본질적인 원인을 유럽 통화 강세가 아닌 원화 가치 하락에서 찾고 있다.
외환시장 관계자들은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원·유로, 원·파운드 환율은 기계적으로 함께 오를 수밖에 없다”며 “여기에 유럽 통화가 정책적으로 달러 대비 비교적 견조한 흐름을 유지하면서 상승 폭이 더 커졌다”고 분석했다.
한국은행과 외환 당국 역시 최근 원화 약세 배경으로 거시경제 기초 체력(펀더멘털)보다 수급 불균형을 지목하고 있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관투자가와 개인, 기업들이 해외 주식·채권 투자를 확대하면서 달러 매수 수요가 상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국은행은 하반기 들어 누적된 원화 약세의 주된 원인으로 해외 투자 확대에 따른 구조적인 달러 수요 증가를 언급했다. 특히 국민연금의 대규모 달러 조달과 환헤지 방식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평가도 나온다. 환헤지는 환율 변동에 따른 손실을 줄이기 위해 미래 환율을 미리 고정하는 거래를 뜻한다.
한은과 외환 당국은 급등하는 환율을 진정시키기 위해 국내(온쇼어) 달러 공급을 확대하고, 국민연금과의 외환 스왑을 연장하는 등 방어 조치에 나섰다. 그럼에도 해외 투자 열풍이 이어지는 한 환율 상승세를 되돌리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로이터는 “한국 당국이 최근 원화 약세를 해외 투자 확대에 따른 달러 수요와 연결해 공개적으로 설명하며 시장 안정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원화가 약세를 보이는 동안 유로화와 파운드화는 달러 대비 가치를 비교적 잘 유지했다. 원화 대비 유로화 가치가 16년 만에 최고 수준까지 오른 배경에는 원화 약세와 ECB의 신중한 통화정책 기조가 동시에 작용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ECB는 최근 정책금리를 2% 수준에서 동결하며 경기와 물가가 비교적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은 이달 기준금리를 인하했지만, 인플레이션 부담을 이유로 추가 인하 속도는 제한적일 것이라는 신호를 줬다. 로이터는 “이번 금리 인하 이후에도 영란은행이 명확한 가이던스를 제시하면서 파운드화 가치의 하방선을 지지했다”고 전했다.
환율 급등은 실물경제에도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로화나 파운드화로 결제해야 하는 유럽 여행객과 유학생, 해외 직구 소비자들은 항공권·숙박비·학비 등 전반적인 비용 부담이 크게 늘었다. 기업들 역시 희비가 엇갈린다. 유럽 매출 비중이 높은 수출 기업은 원화 환산 실적이 개선되는 반면 에너지·부품·소비재를 유럽에서 수입하는 기업들은 원가 부담이 커지고 있다. 환헤지 비용과 환율 변동에 따른 회계 관리 부담도 동시에 확대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향후 환율 방향성이 유럽 중앙은행의 정책보다 국내 원화 수급 상황에 달려 있다고 입을 모은다. 국민연금과 개인투자자 중심의 해외 자산 배분 흐름이 이어지는 한 원화에는 구조적인 약세 압력이 남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로이터는 전문가를 인용해 “한국 금융당국 조치가 급격한 변동성을 완충할 수는 있지만, 전체적인 추세를 바꾸려면 수급 자체가 완화돼야 한다”고 전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doremi@sedail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