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엔비디아의 인공지능(AI) 가속기 ‘H200’의 중국행 빗장을 풀었다. 표면적으로는 수출 허용이지만 속내는 복잡하다. 중국의 기술 자립을 늦추고 미국 기술에 중독되게 만들겠다는 ‘디지털 아편’ 전략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H200에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사실상 독점 공급하는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단기적인 수혜가 예상되지만 중국의 기술 추격 속도에 따라 시장 판도가 요동칠 것이란 전망이다.
10일 반도체 업계와 외신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최근 엔비디아의 H200의 중국 수출을 허가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H200은 엔비디아의 최신 라인업인 ‘블랙웰’ 바로 전 세대 모델이다. 기존 중국 수출용 칩인 ‘H20’과 비교하면 연산 능력이 6배가량 뛰어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중국의 AI 굴기를 견제하기 위해 무조건적인 ‘봉쇄’ 대신 기술 ‘종속’ 카드를 꺼내 든 셈이다. 중국이 미국산 칩을 구하지 못해 독자 기술 개발에 사활을 거는 상황을 막고 엔비디아의 악성 재고를 처리하려는 실리적 계산이 깔려 있다.
미국의 전략 수정, 실속 챙긴 젠슨 황
중국 빅테크 ‘엔비디아 회귀’ 가능성
중국 빅테크 ‘엔비디아 회귀’ 가능성
미국의 전략 선회는 중국의 무서운 추격 속도와 무관치 않다.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SMIC는 올 3분기 매출 기준 세계 3위에 올랐다. 메모리 기업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와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도 글로벌 5위권에 진입하며 한국을 맹추격 중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조치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승리라는 분석도 나온다. 황 CEO는 그동안 “수출 규제가 오히려 중국의 자립을 부추길 것”이라며 칩 판매 허용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내년 차세대 칩 ‘루빈’ 출시를 앞둔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구형이 될 H200 재고를 거대한 중국 시장에 털어낼 기회를 잡게 됐다.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미국 싱크탱크 IFP의 알렉스 스탭 공동창업자는 “이번 결정은 중국의 AI 발전을 돕는 엄청난 자살골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알리바바나 텐센트 같은 중국 빅테크들이 성능이 떨어지는 자국산 칩 대신 검증된 엔비디아 칩을 대거 사들일 경우 결과적으로 중국의 AI 소프트웨어 경쟁력만 높여줄 것이란 논리다.
국내 반도체 업계는 일단 반기는 분위기다.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는 전 세계 HBM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특히 H200에 탑재되는 5세대 HBM(HBM3E) 공급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HBM이 AI 가속기 원가의 약 10%를 차지하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발 수요로만 수조 원대의 추가 매출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엔비디아의 중국 매출이 약 25조 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H200 허용으로 인한 파급 효과는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반도체 자립 속도 일시적 늦춰도
AI 개발 돕는 꼴 ‘독이 든 성배’ 지적도
AI 개발 돕는 꼴 ‘독이 든 성배’ 지적도
축배를 들기엔 이르다는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중국이 미국의 의도를 간파하고 H200 수입을 거부하거나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수입 쿼터를 설정할 가능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화웨이의 자체 AI 칩 ‘어센드’ 시리즈는 이미 엔비디아 제품의 대안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들어가는 HBM 역시 삼성이나 SK 제품이 아닌 CXMT 제품으로 대체되는 추세다.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지난해 24%였던 중국의 AI 칩 자급률이 2027년에는 82%까지 치솟을 것으로 내다봤다.
트럼프 대통령이 H200 판매 대가로 엔비디아에 매출의 25%를 세금으로 내라고 요구한 점도 변수다. 엔비디아가 이 비용을 중국 고객사에 전가할 경우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다. 중국 기업들이 다시 자국산 칩으로 눈을 돌릴 명분이 생긴다. 결국 이번 H200 카드는 미국의 기술 패권 유지와 한국 반도체 기업의 실적 그리고 중국의 반도체 굴기 사이에서 치열한 수 싸움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가 될 전망이다.
中 반도체 투자에도 기술 격차 5년
메모리·파운드리 모두 한국이 우위
메모리·파운드리 모두 한국이 우위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외치며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붓고 있지만 한국 및 글로벌 선두 기업과의 기술 격차는 여전히 존재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과 반도체 업계 분석을 종합하면 한국과 중국의 반도체 기술 시계는 분야별로 최소 1년에서 최대 5년 이상 벌어져 있다.
메모리 반도체의 핵심인 D램 분야에서 중국 1위 CXMT는 현재 17~19㎚(나노미터·1㎚는 10억 분의 1m) 공정에 머물러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력으로 하는 10나노급(1b) 공정과 비교하면 약 5년의 기술 격차가 난다. 낸드플래시 분야에서는 YMTC가 232단 제품을 내놓으며 한국(236단 수준)을 1~2년 차로 바짝 쫓고 있다. 하지만 수율 문제로 대량 양산에는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운드리 격차는 더 크다. 중국 SMIC는 7나노 공정 양산에 성공했지만 이는 구형 장비인 심자외선(DUV) 노광장비를 개조해 만든 것으로 생산 효율이 떨어진다. 삼성전자와 TSMC가 양산 중인 3나노 공정과는 세대 차이만 3세대다. 기간으로는 5년 이상의 격차가 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中 자체 칩 어센드 910B 있지만
H200과 체급 격차 내부 수요 커
H200과 체급 격차 내부 수요 커
기술 자립이 필요하면서도 당장은 중국이 미국의 H200 수출 허용에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체 칩인 화웨이 ‘어센드 910B’와의 성능 차이가 확연하기 때문이다. 엔비디아 H200은 화웨이 910B 대비 메모리 용량은 2배 이상 앞서는 수준으로 보인다. 데이터 처리 속도인 대역폭은 4배가량 차이가 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H200은 현재까지는 최고 사양인 141기가바이트(GB)의 HBM3E를 탑재해 초당 4.8테라바이트(TB)의 데이터를 처리한다. 반면 화웨이 910B는 엔비디아의 2020년 모델인 A100과 유사한 수준이다. 910B는 구형인 3세대 HBM(HBM2E)을 사용하며 메모리 용량은 64GB에 그치는 것으로 파악된다. 데이터 처리 속도 역시 초당 1.2TB 수준으로 H200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제조 공정에서도 차이가 크다. H200은 TSMC의 4나노 공정에서 만들어져 전력 효율이 높지만 910B는 SMIC의 7나노 공정에서 생산된다. 초거대 AI 모델 학습에는 방대한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는 메모리 성능과 전력 효율이 필수적이다. 중국 빅테크 기업들이 정부의 국산 칩 사용 권고에도 불구하고 엔비디아 칩을 찾아 암시장을 헤매는 이유다. 결국 미국이 H200을 푼다는 것은 중국이 따라올 수 없는 압도적인 ‘성능의 벽’을 이용해 중국 시장을 다시 미국 기술 생태계 아래 두겠다는 계산이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갭 월드(Gap World)’는 서종‘갑 기자’의 시선으로 기술 패권 경쟁 시대, 쏟아지는 뉴스의 틈(Gap)을 파고드는 코너입니다. 최첨단 기술·반도체 이슈의 핵심과 전망, ‘갭 월드’에서 확인하세요.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gap@sedail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