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담긴 시약을 이쪽으로 옮겨줄래?”
성인 손만 한 로봇 손이 주사기처럼 생긴 피펫을 움켜쥐었다. 피펫은 액체를 흡입하고 배출하는 화학실험 도구로 통상 수 ㎖(밀리리터)에서 수십 ㎖의 소량을 정교하게 옮기는 데 쓰인다. 로봇 손은 시약통에 피펫 끝을 담그고 엄지손가락으로 눌렀다 떼며 시약을 채취했다. 그리고 팔을 돌려 안약통보다 작은 지름 1㎝짜리 통 안에 피펫을 찔러넣고 역시 엄지손가락으로 지긋이 누르며 시약을 한 방울씩 뚝뚝 흘려넣었다.
바로 옆 모니터 화면에는 로봇 손이 자율주행차처럼 비전(시각 정보) 센서로 시약과 통·피펫을 실시간으로 인식하고 있는 모습이 표시됐다. 공장 로봇처럼 정해진 명령만 반복하는 게 아니라 사람처럼 주변 사물을 눈으로 보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관절 덕에 총 20가지 방향이나 형태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손가락 끝에는 압력과 촉감을 느끼는 다중 센서도 탑재해 피펫을 정교하고 유연하게 다루는 모습이 사람처럼 능숙해보였다. 비전 센서 덕에 바닥에 널브러진 장애물이나 행인을 피하는 일은 이미 기본기였다.
특기는 이 같은 섬세함만이 아니었다. 로봇은 겉보기에 성인 키만 한 건장한 체구를 자랑했다. 기존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와 비교하면 어른과 아이만큼 몸집 차이가 났다. 그만큼 힘도 남다르다고 한다. 수 ㎏ 출력에 불과한 구형 휴머노이드와 달리 쌀 포대나 기내 수하물과 맞먹는 최대 20㎏짜리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다. 국내 최초 피지컬(물리적) 인공지능(AI) 휴머노이드를 표방하는 로봇인 ‘케이펙스(KAPEX)’는 이르면 2029년 가사용 로봇으로 상용화가 추진된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13일 서울 성북구 본원에서 케이펙스 실물을 최초로 공개하고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에게 핵심 기술을 시연했다. 케이펙스는 KIST가 2022년 자체 개발을 시작해 올해 들어 AI연구원, LG전자와 손잡고 기술 고도화와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는 국산 AI 휴머노이드다. 이종원 KIST 휴머노이드연구단장은 “조만간 LG AI연구원의 ‘엑사원 비전언어(VL)’ 모델을 두뇌로 탑재할 계획”이라며 “LG전자와는 가전 사업의 일환으로 가정용 로봇으로 상용화하기 위한 실증을 추진해 2029년 성과를 창출하겠다”고 말했다.
엑사원 개발 주역인 배 과학기술부총리는 케이펙스와 악수를 나누고 사진을 찍더니 LG의 역할을 콕 집어 물었다. 백승민 LG전자 로봇선행연구소장은 “(KIST로부터) 기술이전을 받아 수년 간 공동 연구소를 운영하고 제품화를 앞당길 계획”이라고 답했다. 집안에서 스스로 청소와 정리, 세탁, 식사 준비 등이 가능한 가사관리전문가 2급 수준의 기술을 확보해 가정용 AI 휴머노이드 시장부터 공략하겠다는 구상이다.
AI 휴머노이드는 챗GPT 같은 언어 모델을 넘어 시각·청각·촉각 등 다양한 감각을 학습하고 처리해야 하는 멀티모달(다중모델)을 탑재해야 하고 자율주행차처럼 주변 환경을 실시간 인식해 대응해야 하며 실질적인 노동력 대체를 위해 기계적 성능까지 챙겨야 하는 고난도 기술이다. 특히 집안일은 빨래 개기처럼 정교한 동시에 불규칙적 작업이 많아 휴머노이드가 대체하기에 특히 까다롭다. 케이펙스는 주변 상호작용과 학습·추론이 모두 가능한 KIST 자체 모델 ‘체화 AI’에 더해 LG AI연구원의 엑사원 모델 탑재를 통해 이 같은 한계를 극복 중이다.
케이펙스는 두뇌(AI모델)뿐 아니라 하드웨어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했다는 게 이 단장의 설명이다. 그는 “케이펙스는 키 170㎝, 몸무게 60㎏대로 몸집이 성인과 비슷하다”며 “기존 중국 유니트리의 로봇들이 초등학생 수준인 120㎝대 신장을 가진 것과 비교하면 케이펙스가 더 큰 힘을 내고 효율적으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유니트리 구형 로봇은 한 손으로 2㎏ 정도를 들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가지 작업에 특화한 공장 로봇과 달리 범용 로봇인 휴머노이드는 아직 크기와 출력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인데 국내 연구진이 액추에이터(구동기) 등 관련 기술을 개선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글로벌 경쟁도 거세다. 우선 유니트리는 지난달 20일(현지 시간) 신형 휴머노이드 ‘H2’를 공개했다. 회사 제품군 중 가장 큰 180㎝ 키와 몸무게 70㎏를 갖추며 케이펙스가 전면에 내세운 대형화 성능에서 우위를 과시했다. 미국 스타트업 1X테크놀로지스는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가정용 휴머노이드 로봇 ‘네오’를 출시했다고 밝혔다. 대규모언어모델(LLM)을 탑재해 버튼 클릭이나 음성 명령으로 빨래 개기, 선반 정리를 할 수 있고 주방 조리대 위의 재료를 인식해 요리법도 제안해준다고 업체는 설명했다. 30㎏ 몸무게로도 최대 68㎏ 물체를 들어올릴 수 있다. 가격은 2만 달러(약 2900만 원), 구독으로는 월 499달러(73만 원)다.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 역시 휴머노이드 ‘옵티머스’를 양산할 계획이다.
국내에서는 삼성전자도 최근 엔비디아와 휴머노이드를 포함한 차세대 AI 생태계 협력을 맺으며 대응에 나섰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창업 기업 유로보틱스는 외부 센서로 주변 지형지물을 직접 파악하지 않고 내장 정보만으로도 안정적 보행이 가능한 ‘맹목(盲目) 보행 제어기’를 탑재한 휴머노이드 기술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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