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을 비롯해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이 소형모듈원전(SMR)에 주목하는 것은 SMR이 기존 대형 원전의 단점은 최소화하면서도 안정성과 경제성을 최대화해 전력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기 먹는 하마’로 통하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다. 만약 그래픽처리장치(GPU) 수만 장을 한꺼번에 돌리는 AI 데이터센터 인근에 SMR을 건립한다면 장거리 송전망 구축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과 전력손실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 매몰 비용이 사라져 전기요금 역시 자연히 더 저렴해진다.
재생에너지의 가장 큰 단점인 간헐성 문제도 SMR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은 기후 상태에 따라 출력량이 들쭉날쭉하기 때문에 국가 전력망 전체에 큰 부담을 줄 수 있지만 SMR은 경직적인 대형 원전보다도 출력을 탄력적으로 조정하기 쉬워 재생에너지와 상호 보완 관계에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탄소 감축을 위한 실질적 대안도 현재로서는 원전이 유일하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9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우리나라에 GPU 26만 장을 선공급하겠다고 약속했는데 현재 상황에서는 당장 물건이 와도 GPU를 돌릴 전기가 부족하다”며 “지금 당장은 계획된 재생에너지 공급이 워낙 많아 어떻게든 감당한다고 해도 2030년 이후부터는 SMR과 같은 차세대 원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 SMR에 대한 투자 기회를 놓치면 5년 뒤에는 벌어진 기술 격차를 따라잡기 어려워진다는 의미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도 “한국이 AI 허브로 도약하려면 2030년부터 100만 장 이상의 GPU를 돌릴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SMR 기술에 대한 선제 준비가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아직 SMR 기술이 상용화 수준에 접어들지 못했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인식도 사실과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중국은 지난달 세계 최초의 육상 상업용 SMR인 ‘링룽1호’ 시운전에 돌입했다. 시운전에서 문제가 발견되지 않으면 내년 중 실제 전력 생산에 들어간다는 게 중국의 목표다. 전문가들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SMR 기술 격차가 이미 5년 이상 벌어져 있으며 여기서 지원이 더 이뤄질 경우 그 격차가 10년 이상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더 큰 문제는 반도체·철강·석유화학 등 우리나라 핵심 제조업이 모두 막대한 전력 소모를 기반으로 두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우리나라의 연간 전력 소비량은 올해 552.3TWh에서 2038년 624.5TWh로 증가한다. 대부분 AI 데이터센터 등 미래 첨단산업을 돌리기 위해 필요한 전력 중심으로 소비량이 늘어나는 구조다.
하지만 값싼 원전 대신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만 늘린다면 전기요금이 가파르게 상승할 수밖에 없다. 김동철 한국전력 사장은 최근 “재생에너지 발전단가는 여전히 원전보다 높다”며 “단기적으로는 재생에너지 확대가 전기요금 인상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기 위한 에너지저장장치(ESS) 구축 비용도 만만찮다. 정부의 탄소 중립 시나리오에 따라 태양광발전 비중이 2050년에는 50% 수준으로 확대될 경우 태양광으로 생산한 전력을 저장하기 위한 ESS 설치 비용만 최소 464조 원이 필요한 것으로 추산된다.
국내 반도체 장비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황 CEO가 ‘중국은 전기가 거의 공짜에 가깝다’고 평가했는데 여기에 미래산업의 핵심이 담겨 있다”며 “노동부터 세제·전기요금까지 한국이 해외에 밀리면 제조업 공동화가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성민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도 “탄소 중립과 AI 시대 전력 수요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에너지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SMR이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는 분석도 있다. SMR 추진 선박이 이런 사례다. 중국은 최근 컨테이너 1만 4000개를 운반할 수 있는 세계 최대 원자력 추진 화물선의 세부 사양을 최초로 공개한 바 있다. 만약 중국이 이 기술을 상용화하면 세계 1위인 한국 조선업은 물론이고 동북아시아 안보의 판도까지 달라질 수 있다. 국내에서는 HD현대 등 일부 기업이 SMR 추진 선박 관련 기술력을 상당 수준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국가 지원이 동반되지 않으면 발전의 속도가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문주현 단국대 교수는 “미국 에너지부(DOE)는 SMR의 상업화를 촉진하고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대규모 자금 지원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며 “이런 노력에 힘입어 오클로·테라파워·뉴스케일파워 등 미국의 주요 SMR 기업들이 기술 개발을 선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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