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약 열흘 앞두고 진행된 한미 간 ‘120분 협상’에서는 3500억 달러(약 497조 원) 규모의 투자 구성비가 핵심 의제로 다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직접투자 비율, 투자처 선정 방식, 이익 배분 구조 등 향후 대미 투자 지형에 큰 변화를 불러올 굵직한 이슈들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국은 이번 고위급 협상을 마친 뒤 다음 주까지 실무 협상을 계속하며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 등 협상 ‘키맨’들이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과 만난 16일(현지 시간) 협상에서 양측은 최종 합의에 도달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일본은 미국과의 협상을 최종 타결하면서 △원금 회수 뒤 미국이 이익 90% 획득 △투자처 결정 시 45일 내 달러 송금 등을 골자로 한 투자 이행 방안을 확정한 바 있으나 우리나라는 일본식 합의는 어렵다는 입장을 강조해왔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17일 "한국의 외환시장에 대한 상호 간 이해를 바탕으로 3500억 달러 펀드의 구체적인 자금 구성 비율 등에 대해 큰 방향성을 잡기 위한 논의가 이뤄졌다”며 “세부적인 부분은 실무적으로 추가 작업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우리 측은 직접투자 비율을 당초 계획보다 높이는 대신 투자 리스크를 최소화할 장치를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7월 말 한미 관세 협상 타결 직후 대미 직접투자 비율을 전체 투자 금액의 5% 내외로 계획했지만 후속 협의 과정에서 미국 측이 투자 대부분을 직접투자로 진행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직접투자는 투자자가 책임을 지는 일인 데다 대미 투자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외환을 대규모로 끌어와야 하는 만큼 그 리스크에 대한 안전장치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 구조가 큰 틀에서 확정되면 통화스와프 체결, 원화 지급 등 직접투자 금액 조달 방식에 대한 합의도 속도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을 방문 중인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워싱턴DC의 국제통화기금(IMF) 본부에서 특파원단과 만나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패키지의 스킴(구조)이 확정되면 그에 따라 외환 소요가 나올 것”이라며 “이 부분이 어떻게 변동되는지에 따라 통화스와프가 가능한지, 한다면 얼마나 해야 하는지 등을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정부 안팎에서는 미국 재무부의 외화안정화기금(ESF)을 활용한 통화스와프 체결, 원화 계좌 개설 후 투자금(달러) 현지 조달 등 다양한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아울러 대미 협상팀은 한미 조선 협력 방안인 ‘마스가’ 프로젝트,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사업 참여, 농산물 비관세장벽 완화 등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외 주요 현안에 대한 논의에도 속도를 내며 막판 ‘올코트 프레싱(전방위 압박)’에 나섰다. 김 장관은 이날 백악관 예산관리국(OMB) 국장과 면담한 뒤 “마스가 프로젝트에 대한 논의를 나눴다”고 설명했다. 최근 중국이 마스가 프로젝트를 선도하고 있는 한화오션의 미국 자회사 5곳을 겨냥해 제재를 진행했지만 한미 조선 협력에는 영향이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 셈이다.
미국 국무부 역시 이날 관련한 한국 취재진의 질의에 “(중국의 제재는) 민간기업 운영을 간섭하고 미국 조선 및 제조업 부흥을 위한 한미 협력을 약화시키려는 무책임한 시도”라며 “중국의 행동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 동맹국과 협력국들과의 경제 협력 강화 중요성을 재확인시켜줄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미 국무부는 “우리는 한국과 단호히 함께하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김 장관은 미국 현지에서 17일 더그 버검 국가에너지위원장 겸 내무장관, 앤드루 그리피스 에너지부 부장관 등과도 면담을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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