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윤석열 정부가 첨단산업 육성을 위해 만든 21조 원 규모의 정책펀드 조성액 가운데 절반가량만 실제 투자에 쓰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재명 정부가 150조 원 상당의 국민성장펀드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숫자 부풀리기에 급급한 정책펀드는 민간의 투자 기회만 빼앗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3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이 국회입법조사처에 의뢰해 받은 ‘역대 정부별 대규모 정책펀드 실적’ 보고서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2017~2022년)의 정책형 뉴딜펀드와 윤석열 정부(2022~2025년)의 혁신성장펀드 조성액이 총 21조 878억 원으로 집계됐다.
문재인 정부는 정보기술(IT)과 헬스케어 등을 키우겠다며 2021~2022년 11조 8322억 원 규모의 뉴딜펀드를 조성했다. 윤석열 정부는 뉴딜펀드의 이름을 혁신성장펀드로 바꿔 2023~2024년에 9조 2556억 원의 자금을 동원했다. 하지만 두 펀드의 실제 투자액은 10조 1323억 원에 그쳤다. 비율로는 48%에 불과하다. 김 의원은 “정부 입장에서는 정책펀드 투자 목표치를 과도하게 높여 잡을 유인이 크다”며 “민간자금의 발을 묶는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숫자 부풀리기에 민간 돈 묶여
2020년 9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정책형 뉴딜펀드로 20조 원을 조성해 한국판 뉴딜 분야에 집중 투자할 계획”이라며 “시중의 풍부한 유동성을 부동산과 같은 비생산적인 부문에서 생산적인 부문으로 이동시킨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발표했다.
이재명 정부가 추진 중인 150조 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와 목표와 의의가 비슷하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 주도로 민간·정책금융을 매칭해 대규모 펀드를 만든 뒤 신산업과 같은 생산적인 부문에 투자한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뉴딜펀드와 이재명 정부의 국민성장펀드는 공통점이 많다”고 설명했다.
중요한 것은 문재인 정부에서 처음으로 조성되고 윤석열 정부에서 계속해서 운용한 정책펀드의 투자 집행 실적이 부진하다는 점이다. 2021~2022년 두 차례에 걸쳐 문재인 정부가 조성한 뉴딜펀드의 총투자 실적은 올해 7월 말 기준으로 8조 4674억 원이다. 전체 조성 실적(11조 8322억 원)의 71.6% 수준이다. 투자 업계의 관계자는 “일부 벤처캐피털(VC)에서는 2023년 초에 조성한 펀드의 약 70%를 올해 말까지 투자에 쓰는 것을 목표로 잡기도 한다”며 “그보다 이전인 2021~2022년 조성된 펀드의 투자 집행률이 70% 수준인 것은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뉴딜펀드가 혁신성장펀드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투자 집행이 지지부진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혁신성장펀드는 2023~2024년 각각 1·2차 펀드를 조성해 총 9조 2556억 원을 모았는데 이 중 투자된 액수는 1조 6649억 원에 불과했다. 모은 돈 중 18%만 투자에 쓴 것이다.
금융계에서는 정부와 산업은행 등이 일단 펀드 조성 실적부터 달성하려고 했던 탓에 투자 집행률이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실제로 정부는 2021~2022년 총 8조 원의 뉴딜펀드를 마련하려고 했는데 실제 조성 실적(11조 8322억 원)은 이보다 3조 8322억 원 더 많았다. 혁신성장펀드의 조성 실적(9조 2556억 원) 역시 당초 목표치(6조 원)를 3조 2556억 원 웃돈다. 금융위원회에서도 운용사 선정·공고 절차를 간소화하는 식으로 최대한 신속하게 조성액을 모으려고 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민간자금이 정책펀드에 묶이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뉴딜펀드(9조 1000억 원)와 혁신성장펀드(7조 4426억 원)가 모은 민간자금은 총 16조 5426억 원에 달한다. 전체 조성액의 약 78%를 차지한다. 시장에서는 약 8조 원 안팎의 민간자금이 투자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배승욱 벤처시장연구원 대표는 “지난 4년간을 보면 모험자본 시장이 상당 부분 얼어붙어 있었다”면서도 “정책펀드이다 보니 투자 타이밍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역으로 민간자금이 펀드 안에 묶이는 식으로 민간투자에 대한 구축 효과를 불러왔을 수 있다”고 해석했다.
"뉴딜·혁신성장펀드, 국민성장펀드로 통합해야"
이를 고려하면 국민성장펀드 역시 꼼꼼하게 투자처를 정하지 않으면 향후 경제 상황에 따라 구축 효과를 유발할 공산이 크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특히 국민성장펀드의 목표 조성액은 150조 원에 달한다. 뉴딜펀드와 혁신성장펀드의 총조성액(21조 878억 원)을 크게 웃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펀드 결성 지연, 투자 집행률 저조 등에 대한 관리·감독이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의원도 “국민성장펀드가 민간자금의 구축 효과를 유발하지는 않을지 유의해야 한다”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정책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난립하고 있는 정책펀드를 한데 통합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재명 정부가 초대형 국민성장펀드를 조성하고 있는 만큼 뉴딜펀드와 혁신성장펀드에서 투자되지 않고 남은 자금을 국민성장펀드로 합쳐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도 이 같은 방안을 들여다 보고 있다. 국민성장펀드와 투자 영역이 겹치는 반도체 생태계펀드와 원전산업성장펀드를 국민성장펀드로 병합할지도 검토 대상이다. 금융 당국의 한 관계자는 “지역활성화펀드를 제외하면 반도체·원전 등 투자 영역이 유사한 펀드는 국민성장펀드에 합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책펀드 효율화 위해 독립 투자위 필요"
국민성장펀드를 포함해 향후 정책펀드가 효과적으로 운용되려면 독립적인 투자위원회가 설치돼야 하다는 조언도 나온다. 입조처는 “국민성장펀드의 효과적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시장 원리에 기반해 민간투자자에 대한 인센티브를 늘려야 한다는 제언이 있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입조처는 △독립 투자위원회 설치 △정부의 일부 투자 손실 부담 △세제 혜택 강화 등을 거론했다. 입조처는 “투자 기업의 상장 요건을 완화하고 일정 조건을 충족하는 기업에 공정거래법상 M&A 규제를 완화해 수익 실현(엑시트)를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고 설명했다.
국민성장펀드가 민간의 부담을 키울 수도 있다는 의견도 소개했다. 정부는 국민성장펀드 조성액 중 절반인 75조 원을 민간을 통해 유치할 계획이다. 입조처는 “금융회사와 기업의 부담이 가중되는 측면이 존재한다는 해석이 있다”며 “시장 본연의 논리 또는 투자 판단 원칙과 충돌하거나 민간 자본의 효율성을 저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고 언급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정책펀드의 연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입조처는 “과거 녹색성장펀드와 통일·뉴딜펀드 등 대규모 정책펀드의 경우 정권 교체 시 투자 연속성·안정성이 저해되는 측면이 있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뉴딜펀드를 혁신성장펀드로 바꾸면서 재정 출자액을 급격히 줄였다. 실제로 정부가 2021~2022년에 걸쳐 뉴딜펀드에 투입한 돈은 총 1조 1100억 원이었다. 반면 2023~2024년 혁신성장펀드에 들어간 재정은 이보다 47% 적은 5885억 원이었다. 윤석열 정부가 펀드의 이름을 바꾼 것도 문재인 정부의 정책 구호였던 ‘한국판 뉴딜’을 지우려는 취지였다는 얘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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