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기술 접목은 제약·바이오 산업은 물론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입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가 AI와 로봇을 이용해 신약을 개발하는 자율주행연구실(Self-Driving Lab)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도 그 일환입니다. 다음 달부터 본격 가동할 예정인 자율주행연구실에 이미 여러 기업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고, 사용 요청도 밀려들고 있어 산업 발전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노연홍(사진) 한국제약바이오협회장은 12일 서울 방배동 협회 본관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올해로 설립 80주년을 맞은 협회가 제약·바이오 산업의 미래를 위해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한 결과가 바로 AI 신약 개발 지원 인프라 구축”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자율주행연구실은 AI와 자동화 장비, 로보틱스, 고속 실험 기법 등을 결합해 과학 실험 설계·수행·분석·결정을 인간의 개입 없이 반복 수행할 수 있도록 한 실험 플랫폼이다. AI가 자율적으로 가상의 실험을 진행하는 ‘AI 에이전트 기술’과 더불어 AI 신약 개발을 위한 필수적 기술로 꼽힌다. 정부는 올해 2차 추가경정예산안을 통해 제약 산업 육성·지원 예산을 늘리면서 27억 원을 자율주행연구실 도입에 배정했다. 이 사업은 협회가 정부에 건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지난달 초 사업자 입찰 결과 협회가 사업자로 선정됐다. 노 회장은 “지난 5년간 회원사들을 대상으로 AI 교육 사업을 진행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며 "자율주행연구실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을 스케일업할 수 있는 단계까지 끌어올린다면 개별 기업은 물론 업계 전반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글로벌 빅파마를 포함해 전 세계 제약·바이오 업계는 AI 신약 개발에 공을 들이고 있다. 신약 후보 물질 발굴부터 실험·분석 등에 투입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어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 따르면 글로벌 AI 활용 신약 개발 시장 규모는 2021년 약 4억 달러에서 연평균 46%씩 성장해 2027년에는 40억 달러까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국내 AI 신약 개발 분야는 아직 도입 수준이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고 기업들의 투자 규모도 미미한 상황이다. 대형 제약·바이오 기업들조차 글로벌 빅파마들에 비해 큰 차이가 나고 있다. 노 회장은 “개별 기업이 AI 신약 개발 기술 전반을 모두 다루기는 어렵기 때문에 협회 차원에서 나서야 한다고 판단했다”며 “지난해 협회 부설 AI신약연구원을 만들고 범부처 ‘연합 학습 기반 신약 개발 가속화 프로젝트(K-MELLODDY)’ 사업을 주도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노 회장은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가 AI를 활용한 신약 개발에 속도를 낸다면 지금이 바로 선진국과의 격차를 줄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있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가 AI 기술을 잘 활용한다면 현재 12~13위 수준에 머물고 있는 산업 경쟁력을 5~6위로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전망의 근거는 국내 기업들이 보유한 신약 후보 물질의 개수다. 글로벌 시장 분석 기관인 이밸류에이트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보유한 신약 후보 물질은 3233개로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 수준이다. 미국의 신약 후보 물질은 1만여 개에 달하고 중국은 약 6000개인 것으로 집계된다. 노 회장은 “제약·바이오 산업 분야에서 중국이 잘나가는 것 같지만 인구 대비 신약 후보 물질 개수를 따지면 우리의 두 배에도 못 미친다”며 “시간과 인력 부족을 메워주는 역할을 AI가 맡아주면 우리도 얼마든지 블록버스터를 탄생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블록버스터 한두 개만 제대로 만들어도 매우 큰 수익을 일으킬 수 있고, 국내 기업 중에서 그런 가능성이 있는 곳이 적지 않다”고 강조했다.
특히 노 회장은 최근 수십 년 동안 의학·약학·생명공학으로 몰렸던 국내 우수 인재들이 제약·바이오 산업 분야로 대거 배출되기 시작하고 있어 AI의 발전과 맞물리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수 인재들이 쏠렸던 학과와 연관된 산업이 일정 기간 후에 어김없이 융성했던 국내 산업 발전의 역사가 제약·바이오 산업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 회장은 “지금 추세로만 가도 2027년이면 글로벌 경쟁력이 10위권에 진입할 수 있다”면서 “우수한 인재들이 제약·바이오 산업에 유입되면서 AI와 맞물려 블록버스터 의약품 몇 개를 만든다면 단숨에 5~6위에 충분히 진입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정부도 제약·바이오 산업 육성 의지가 강하다. AI, 바이오(Bio), 콘텐츠·문화(Contents and Culture), 방위산업(Defense), 에너지(Energy) 등 이른바 ‘ABCDE 5대 미래 산업’에 바이오 분야를 포함시켰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초 타운홀미팅 형태로 ‘바이오 혁신 토론회’를 열어 제약·바이오 업계 관계자들의 건의 사항을 직접 청취하기도 했다. 내년 예산안에서 보건복지부의 보건의료 연구개발(R&D) 예산을 사상 처음 1조 원대로 늘리기도 했다. 노 회장은 “정부가 관심을 쏟고 키우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 자체가 반가운 일”이라고 반기면서도 “정부의 R&D 지원 규모가 빅파마들을 따라잡기에는 부족한 만큼 예산 지원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ABCDE 5대 미래 산업의 R&D 예산 10조 원 중 제약·바이오 산업에 투입되는 예산은 2조 원 정도인데 절대적 액수가 빅파마들의 투자 규모에 비하면 부족하다”며 “R&D를 중심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업체에 좀 더 많은 지원을 하는 정책이 도입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의 전신은 ‘다한약품공업협회’로 1945년 10월 26일 출범했다. 광복과 역사를 나란히 하며 국민들의 건강을 책임져온 제약사들을 지원해왔다. 협회는 설립 80주년을 맞은 올해 여러 기념 사업은 물론 미래를 위한 다양한 준비도 진행하고 있다. ‘비전 2030’이 대표적이다. ‘K파마, 건강한 미래로’라는 슬로건하에 신약 개발 능력 강화, 글로벌 진출, 품질 향상을 통한 공급망 안정화라는 세 가지 목표를 제시했다. 구체적으로는 2030년까지 △회원사의 매출 15% 이상 R&D 투자 유도 △블록버스터 신약 5개 이상 배출 △글로벌 톱50 업체에 국내 기업 5개 진입 △원료의약품 자급률 제고 등을 목표로 세웠다. 노 회장은 “비전 2030으로 제시한 목표들은 중장기적으로 계속 끌고가야 할 과제로 매년 구체적 실천 과제를 새롭게 만들어 이행해나갈 것”이라며 “협회장이 바뀌어도 2030년까지 목표를 실현할 수 있도록 산업계 전체에 내재화시켜 실천 방안으로 나아갈 수 있게 체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협회는 이 외에 ‘신약 개발 스토리북’도 발간한다. 국산 신약이 40개가 되도록 제대로 된 소개 책자가 하나도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단순한 백서가 아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스토리북 형식으로 준비했다. AI 신약 개발의 기초부터 응용·심화 단계까지 아우르는 교과서도 낸다. 협회가 의약품 광고 심의 업무를 담당하면서 쌓아온 이야기도 책으로 엮어서 낼 예정이다. 노 회장은 “올해 협회가 설립 80주년을 맞는다고 말하면 모두들 놀란다”며 “제약·바이오 산업이 전환기를 맞이한 상황에서 협회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He is…
△1955년 경기 파주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 △뉴욕대 건강경제학 석사 △차의과학대 보건학 박사 △1983년 행정고시 27기 △2005년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본부장△2008년 대통령실 보건복지비서관 △2010년 식품의약품안전청장 △2011년 대통령실 고용복지수석비서관 △2013년 가천대 부총장 △2019년 김앤장법률사무소 고문 △2024년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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